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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의길벗 라종렬 Feb 06. 2021

누가복음 11:37-44 탐욕과 악독을 화의 선포로 다

누가복음 11:37-44 

누가복음 11:37-44 탐욕과 악독을 화의 선포로 다스리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이 굳게 세워둔 배제의 벽을 허무시면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세 가지씩 화를 선언하시면서 바른 정신과 온전함과 공의와 사랑과 자기부인의 길로 돌아 설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의 기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등등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통적인가? 성경적인가?

우리의 신앙은 겉과 속이 깨끗한가? 

우리의 신앙은 공의와 사랑으로 행하는가?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자기부인의 길에 서 있는가?


# 37-38절 전통도 하나님의 바른 말씀 위에 온전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주님과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면서 정작 장로들의 유전(전통)을 따라 행하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히’여기는 바리새인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신앙의 많은 부분은 성경에 근거하기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통해서 자연스레 익힌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배와 기도 찬양 봉사 구제를 비롯하여 신학과 교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전통을 통해 전수받은 신앙도 귀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버리거나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통은 왜곡 내지 변질될 우려가 있기에 늘 성경에 근거하여 과연 합당한지를 점검해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전통 안에 신앙을 가두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통이 신앙의 울타리가 되는 긍정의 요소가 있지만 하나님마저도 그 안에 가둬 버려서 풍성한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오해 내지 왜곡된 이해에 갖히게 하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급기야 그렇게 전통에 갇힌 하나님은 우상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고 묵상할 때에도 내가 알고 있는 교리와 신학적 틀이 중요하지만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며 내가 성경을 제단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진단하게 하고,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바를 귀기울여 들으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상고’해야지 ‘이상’히 여겨 주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 위함이요,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며 우리를 향하신 그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분별하기 위함입니다. 


# 39-41절 겉과 속이 투명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겉은 깨끗하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의 모든 것을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소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구제할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깨끗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독히도 외모에 치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어린아이들까지도 예뻐지기 위해 화장을 하고 수술을 하는 분위기입니다. 교회 예배당도 화려한 외장과 내부 인테리어를 통해서 번들거리는 외양을 자랑합니다. 수 억도 정도는 우습고 수 천억을 들여 만든 예배당을 폐하여진 개념인 ‘성전’이라 칭하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세워갑니다. 어느날 부터인가 하나님 앞에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이제는 건물 안에 하나님을 가둬 버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 성전은 부패하고 왜곡된 신앙인으로 아니 종교인들로 가득하여 거룩은 커녕 경건의 모양도 냄새가 나고 더욱 경건의 능력은 진즉 물건너간 형국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관심없고 오로지 경제적 이익과 세상적 성공을 위한 탐욕으로 지도자들은 약한 이들의 밥그릇까지 닥닥 긁어서 헌금을 강요하고, 양젖은 짜야 나온다고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성도를 쥐어짜는 형국입니다. 세상에서 성도들은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 부와 권력을 탐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악독한 일도 서슴지 않으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치부를 가리지도 않고 오히려 그것을 성공으로 축복으로 여기며 간증까지 합니다. 

언행일치, 신행일치,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거룩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룩한 삶이어야 깨끗하고 온전하다 할 터인데 우린 철저하게 신앙따로 삶 따로, 교회와 세상에서의 삶이 이중적인 이상한 성도를 무수히 양산하고 있으니 어찌할꼬? 


# 42절 헌금은 공의와 사랑으로 드리고 또한 집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꼼꼼하게 십일조를 한다 할지라도 원래 그런 제도를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과 원칙 곧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공의와 사랑의 정신을 갖지 못하고 행한다면 결국 그것은 외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십일조는 철저하게 공의와 사랑에 근거해야 합니다. 돈놓고 돈 먹기 식의 축복의 수단이나 신앙의 척도로서 판단의 근거가 되게 하는 십일조는 지양해야 합니다. 구약 성막과 성전이 있을 때에 제사장과 구제를 위해서 행해지던 십일조는 성전이 파괴되면서 자연히 폐지되지만 오늘날 교회가 성전의 기능을 동일하게 행하고 있기에 전임목회자와 구제를 위해서 십일조의 정신을 이어받은 연보는 드려지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 기준을 1/10정도도 하되 기계적으로 계산하여 적용하거나, 힘에 넘치도록 무리하게 드리도록 강요하고 부담하는 것 역시 지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를 드리느냐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자세는 바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기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공의와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어떤 신앙적 헌신과 연보도 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됩니다. 

지금 행해지는 헌금을 비롯하여 여러 신앙적 행위들의 근저에는 공의와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전통과 성경에 근거한 신앙이 날마다 점검되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공의와 사랑의 정신이 기초하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 43-44절 권위는 겉과 속이 투명하고 온전함에서 나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평토장한 무덤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알량한 권력의 맛을 들인 교회의 지도자들, 세상에서는 별볼일 없으면서 교회에서 대접받는 것을 벼슬로 생각하여 어느새 목이 곧아지는 지도자들, 그런 맛에 들려 정치인들에 빌붙어 콩고물에 일희일비하는 지도자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거룩한 척하지만 정작 그 속사람은 온갖 탐욕과 악독과 교만으로 가득한 지도자들, 이들을 가리켜 평토장한 무덤이라 하며 썩은 내가 진동하는 이들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겉과 속을 만드신 하나님은 다 아시는 것입니다.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열광할 때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취하려는 유혹이 있을 때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던 주님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제자도는 주님이 가신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목회자에게 리더에게 교사들에게 그리고 화려한 은사와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 이들에게는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의 시간이 없이는 언제고 평토장한 무덤처럼 냄새나는 죄인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한 두번이 아니라 일평생 긴장하며 사워야 할 지극히 가까이에서 수시로 우리를 미혹하는 요소입니다. 


# 45-54절 외식하는 이들의 길에도 화는 동일하게 임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바리새인을 향한 화의 선언에 스스로 양심에 찔림이 있어 예수님께 왜 같이 모욕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동일하게 세 가지 화를 선언하시면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행하는 패역함을 드러내십니다. 자신들도 지키기 힘든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는 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조상들과 같은 길로 행하는 일, 지식의 열쇠로 천국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도 못들어가고 가는 자도 막는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의 죄악을 물을 것임을 천명합니다. 이에 그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책잡고자 벼르게 됩니다. 

말씀을 맡은 자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우선은 자신이 가장 깊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길로 행하도록 안내하고 가르치고 도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 길로 행하지 않은 것은 일차적으로 말씀을 맡은 자가 잘 전하고 가르치고 인도하며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는 커녕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무거운 규례와 전통을 세워두고사 자신들도 못지키는 일을 성도들을 향하여 강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워서 큰 부담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 주님 앞에 나아오는 일을 꺼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태에 대한 개혁을 말하는 이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밥줄까지 위협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변질된 신앙 노선을 수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왜곡되고 삐뚤어지게 보고 살고 가르치다 보니 어느새 자신들도 딴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살아가려는 이들도 기울어서 보고 급기야 그런 이들의 길을 막습니다. 

진리 안에 서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거칠어집니다. 목소리도 커지고 대화와 설득이 아니라 힘과 무력으로 제압하려 합니다. 급기야 막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면서 크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알량한 지식과 건물 안에 가두고 죽은 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신이라 착각하고, 자신들의 탐욕에 기인한 생각들을 신의 뜻이라 착각하고, 그런 신의 마음을 잘 구슬리고 도움을 얻어 결국 탐욕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얼마나 종교기득권자들의 행태가 심각한지요. 바로 그런 자리에 지금 내가 소속되어 있음을 알기에 두렵습니다. 나를 바로 알아가고 말씀의 거울에 비추고 더불어 함께 서로를 진단하면서, 나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너그러움으로 그리고 진리의 말씀앞에서 냉정하게 우리를 빚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길 원합니다.  


# 거둠의 기도

주님 신행일치한 믿음 갖고, 

겉과 속이 정결한 삶으로 

공의와 사랑의 정신을 기초로 

겸손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주님 가신 그길 온전히 따르길 원합니다. 

내가 선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나의 말과 행실은 바로 서 있는지

그 안에 주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지

주여 바로 단장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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