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8_쉴만한물가
20220328_정의와 사회권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이방인,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심신미약자, 장애인, 병약자 등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기 어려운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 중에 한 사람, 한 부류라도 언급되는 것은 다른 모든 연약한 이들을 제유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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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개념은 시대마다 변해 왔다. 서양에서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 또는 ‘공정성’을 정의라고 불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정의를 마아트라고 칭했는데, 이는 질서와 법을 뜻하는 말인 동시에 정의라는 의미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주요한 특징을 국가 법률의 준수와 국가 질서에 대한 순응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동양에서는 ‘의로움(義)’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현대사회에서 정의란 ‘공정’의 측면을 강조한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강조한다. 이는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필요로 하는 몫을 결정하는 분배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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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정의는 ‘교정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로 나뉜다. 전자는 국가의 법을 공평하게 집행함으로써 실현되는 정의이고, 재산과 신분적 분쟁을 조정하는 민사 재판을 통해 실현하는 배상적 정의나 범법자를 처벌하는 형사 재판을 통해 실현하는 형벌적 정의가 이에 해당된다. 분배적 정의란 사람들 간에 이익과 부담을 공정하게 분배할 때 실현되는 정의를 말한다. 개인적, 사회적 이익으로 부, 권력, 기회 등이 있으며, 부담으로는 납세, 국방의 의무등이 있다. 형식적, 실질적, 결과적, 절차적 정의등으로 세분된다. 필자가 정의를 일한 만큼의 대가를 제대로 보장받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세분화된 정의의 개념중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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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덜 교수는 그의 책에서 다양한 정의에 대한 개념을 소개하면서 독자에게 다시 질문하면서 정의에 대한 개념을 오늘에 맞게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러면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세대들에서 주장했던 정의와 오늘 날 주장하는 정의 사이에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의관으로 세워 정의의 개념을 확충시켜가야 하는 과제를 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가 제시한 정의를 곧이곧대로 믿기 보다는 스스로 정의에 대해 고뇌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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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 언급한 연약한 이들에 대한 제유를 언급한 이유는 이들에 대한 생존권이나 기본권등의 보장이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 실현 유무의 기준이 되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는 분배적 정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살펴보면 이러한 분배적 정의가 불의하게 되는 것을 보면 교정적 정의의 부재와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연관된 죄로 말미암아 불의함이 득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 혹은 예언가들은 그런 세상을 향하여서 종교 제의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그것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라고 다양한 퍼포먼스와 메시지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권력을 갖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정의에서 거리가 멀면 그는 실패자요 부정한 이들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도 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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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권’이라는 말을 또 알게 되었다. “헌법학에서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 근로의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주거권, 보건권, 또는 건강권 등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국제적으로 유엔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협약’에 규정되어 있는 권리다. 풀어 말하면 노동, 주거, 복지, 생계, 의료 등의 분야에서 사회, 경제적 약자가 인간적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시회권은 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국가의 ‘시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조국의 <가불 선진국>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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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글에서 먼저 사회권이 정의와 연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회권이 제도와 실행이 바르게 행해지는 것이 곧 정의의 실현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스스로가 인식하고 보장받아야 하고 있어야 하는데 위에서 보면 시민의 권리가 아닌 국가의 시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상급식등의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제도를 만들고 시행해야 하는 입법, 사법, 행정부가 찬반이 나뉘고, 마치 권력을 가진 자신들이 뭔가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무상급식의 ‘무상’이라는 말을 빼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한 기본 권리를 찾는 것이지 시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차이는 극단적 영역의 선동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모든 일이 기울어지거나 삐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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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세계 각국 사이에서 무력으로 경찰노릇하는 미국같은 나라? 독재자의 탐욕을 실현하기 위해서 힘과 영토를 더 확장하는 러시아같은 나라?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인민의 나라를 표방하면서도 전체주의가 더 굳어져 가는 중국같은 나라? 강자 앞에서는 비굴하고 비열하며, 약자 앞에서는 교묘하고 교활하게 자신들의 이를 탐하면서 수십년동안 기득권을 놓지 않고 군국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같은 나라? 모두 아닐 것이다. 누구도 그런 나라를 정의로운 나라라 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 가고 싶은 나라는 그런 나라는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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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슨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국가를 설계하려 함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과 싸움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살펴보고 분석해 보면서, 제대로 서있는지 알아보고, 또 어디로 가야 할지 그래도 나름의 방향이라도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다. 서두에서 언급된 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간의 실존을 제유하고 있다. 우리는 독처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권이 되찾고, 주어지고, 보장되고, 채워져야 한다. 그래서 정의 곧 사회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누가 할까? 일개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모두가 함께 이것에 대한 고민을 공론화 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무지에서 깨어나 성숙한 의식과 지식의 전환과 진보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러한 일을 만들고 시행해 가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의 책임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누군가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도 소홀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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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러한 기본권이 꼭 욕심을 가진 이들로 인해 편중되고 기울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제도와 체제와 의식과 지식 그리고 힘이 있다하더라도 그런 이들의 탐욕으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계속).
2022년3월28일
평화의길벗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