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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Sep 30. 2024

나의 로망 따위 보다야, 너희의 배부름이 더 났다

밀 농사는 개뿔

#텃밭에 밀을 심었다


아침, 창 밖으로 들리는 참새 소리가 요란하다.

'비가 내려 하늘이 깨끗하고 공기도 맑으니 새들도 신이 났구나' 하며 룰루루 참새를 보러 나가본다.


작은 텃밭에서 자라나고 있는 밀

작은 텃밭에 밀알을 조금 뿌려두었는데 그것이 자라 어느새 알알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참새들의 소리가 매우 신나게 들렸던 건 이 때문이었다.

얼마 안 되는 나의 밀을 두고 참새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가 본다.


내 발걸음에 놀라 후두둑 날아가는 녀석도 있고, 미련이 남았는지 멀리 가지 못하고 주위를 계속 맴도는 녀석도 있었다.


밀꽃이 피었고, 알곡이 단단히 여물겠구나 하며 들여다보았던 게 며칠 안된 것 같은데

그새 잘 여물어 맛이 알맞게 들었었나 보다.

참새들이 맛있게 다 먹었네.

내 것도 조금만 남겨주지.


우리밀로 천연발효빵을 만드는 나는

직접 밀을 키워 빵 한 덩이 구워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타샤 튜터님의 안온하고 여유로운 손놀림 같은 로망.


# 또 다른 로망


역시 로망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로망인 것이다.

밀알이 모두 사라진 밀 줄기를 잡고는 참새들과 함께 허허 짹짹 웃는다.


내 로망이 무슨 대수라고, 너희가 배불리 먹고 나의 텃밭정원에 영양 가득한 똥 잔뜩 남겨주면 그것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지.

뿌리를 길게 내리는 밀 덕분에 나의 작은 텃밭은 많이 비옥 해졌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인간의 로망 따위가 우선 될 일이 아니다.


작은 실험실처럼 조금씩 심고 관찰하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구현해보는 텃밭이다 보니 밀을 다 먹어버린 참새에게도 마음을 넓게 쓰게 된다.

밀을 수확하고 제분하여 판매해야 하는 농부에게는, 이런 새의 방문이 참으로 불편한 일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꼭 쫓아내야 할 중요한 일일 텐데 나에겐 허허 웃어넘기는 일이라는 게, 괜히 혼자 미안해진다.

농사의 모습도 여러 가지여서 각자의 상황이 다를진대, 나는 감사하게도 생계형 농사를 짓지 않으니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다.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렇게 참새에게 허허 웃어줄 수 있는 가벼운 텃밭이 누군가에겐 로망이겠구나 싶어 진다.

참새 때문에 로망을 잃은 줄 알았는데, 참새 덕분에 로망을 이루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누군가의 로망일지 모른다.

그러니 밀알이 남지 않은 것에 좌절하지 않고, 참새에게 맛있는 밀을 제공할 수 있는 텃밭을 가꾼 것에 대해 뿌듯하게 여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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