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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r 08. 2021

포르투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체류기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아침이 밝았다. 비행기 탑승이 오전 10시 50분이라 숙소에서 여유롭게 7시에 출발했다. 짧게 포르투 공항 Aeroporto do Porto이라고 부르는 프란시스쿠 드 사 카르네이루 공항 Aeroporto Francisco Sá Carneiro까지는 볼량 역에서 보라색 E선을 타고 30분 정도 걸렸다. 환승을 하지 않아도 되고 Aeroporto 역은 종점이라 일단 지하철을 잘 타기만 하면 별로 신경 쓸 거리가 없었다. 처음으로 볼량 역 근처에 숙소를 잡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잘 타야 한다’는 건 플랫폼에 들어오는 지하철이 보라색 E노선이 맞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처럼 예를 들어 1, 3, 5호선 세 개 노선 환승역에서 각 호선별로 플랫폼이 따로 있지 않았다. 볼량 역의 경우 한 플랫폼을 포르토 지하철 전체 6개 노선 중 D노선을 제외한 A, B, C, E, F노선이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철 전광판에서 도착할 노선과 시간을 확인하고, 최종 목적지가 공항이라 캐리어나 배낭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탈 때 같이 타면 되어서 별일은 아니었다.


이 글은 환승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체류기에 가깝다. 오전 7시에 숙소에서 출발해서 오전 8시 즈음 공항에 도착해 기다리다가 오전 11시 20분이면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을 떠나겠지만 한국에 있는 집으로 가는 거의 만 24시간이 걸리는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7시간가량 환승 대기를 했다. 점심시간을 제외한 하루 업무 시간을 8시간이라고 했을 때 거의 하루 종일을 공항에서 보낸 셈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기에 이번 여행에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보낸 하루도 무척 소중했다. 포르투갈로 갈 때는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시간이 어두컴컴한 밤에 가까운 해도 뜨기 전인 이른 새벽이라 상점 등이 대부분을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스키폴 공항의 낮은 시끌벅적하고 왁자지껄했으면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모든 면이 새로웠다.


스키폴 공항


무엇보다 공항의 규모에 놀랐다. 2시간 40분의 비행 끝에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는데 포르투갈로 갈 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공항 전체가 북새통이었다. 아침 출근길처럼 모두가 바삐 제 갈 길을 걸었는데 도시의 사무실 밀집 지역처럼 삭막한 풍경이 아니었다. 똑같이 붐비지만 이곳엔 무표정한 도시인은 없었다. 기대감과 설렘, 활기와 에너지로 가득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하게 아는 듯이 보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티켓에도, 전광판에도, 공항 어디에도 아직 내 비행기의 게이트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가야 할 터미널이라도 알면 좋을 텐데…… 처음 유럽 여행을 했을 때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서 터미널이 여러 개인 줄 몰라서 곤욕을 치를 뻔한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는 파리에서, 나는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마드리드에서 만나 같이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내 도착 시간이 더 빨라서 친구는 연착 없이 잘 오고 있는지 전광판에서 친구가 알려준 항공기와 도착 시간 등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친구가 알려준 비행기를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와이파이 구역에서 카카오톡으로 연락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불과 12~13년 전엔 카카오톡도, 스마트폰도 존재하지 않았고 구글맵이 아니라 관광 안내소에서 얻은 종이 지도를 보며 여행을 했었다. 알고 보니 아돌포 수아레스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Aeropuerto Adolfo Suárez Madrid-Barajas에는 1~4 터미널이 있었고, 나는 4 터미널에서 2 터미널에 착륙할 비행기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숙소의 위치를 친구만 알고 있어서 서로 어긋나면 내겐 큰 타격이었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우리 둘은 공항에서 어긋나 버렸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살아날 수 있다더니 위기에 몰리니 감춰져 있던 기지가 발휘되었다. 공항에는 5분인가, 10분인가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이 있었다. 컴퓨터 형태는 아니고 대형 쇼핑몰에서 길을 안내하는 허리 높이로 누워있는 LCD 모니터 같은 형태였다. 한국어 지원이 되지 않았고, 인터넷은 심하게 느렸고, 인터페이스에도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엔 어버버 하다가 정해진 시간을 다 써버렸다. ‘후~’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두 번째 도전을 이어갔다. 종료 몇십 초를 앞두고 그토록 바랐던 싸이월드 방명록에 접속했다. 거의 다 됐는데 이번에도 시간이 다 되었다며 깨끗한 초기 화면으로 돌아갈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친구는 방명록에 숙소 이름과 주소, 대략적인 위치와 기다리다 먼저 가니 숙소에서 만나자고 남겨놓았다. 내 생각과 친구의 생각이 통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마침내 숙소에서 재회를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다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으로 돌아오면, 갈 곳을 잃은 미어캣처럼 가만히 서서 두리번거리다가 몇 개 줄지어 있는 창구를 발견했다. 티켓 발권이나 출입국 전담 데스크, 아니면 안내 데스크 같아 보이진 않았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을 복합적으로 하는 곳인 것 같기도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줄을 섰고 내 차례가 왔을 때 티켓을 내보였다. 아직 한참 남은 21시 35분에 이곳에서 서울 인천으로 가는 KLM Royal Dutch Airline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애절하게 물어봤다. 많은 안내들이 화면에서 활자(text)로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는 물음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만큼이나 막연해 보였다. 직원은 당황하지 않고(익숙한 상황인가?)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티켓에 크게 ‘F6’이라고 적고 방향을 알려주었다. 하마터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애먼 데서 헤맬 뻔했다. 역시 모를 때는 물어봐야 사서 고생을 하지 않는다.


유럽 공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샛노란 개나리색 바탕에 검은색 굵은 고딕체로 쓰인 방향 표지판에서 D E F G H 표시를 따라갔다. 스키폴 공항의 세 개 터미널은 지붕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따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그만큼 전체 규모가 엄청났고 내가 찾는 F 섹션은 터미널 3에 속했다. 넓고 길게 뻗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각 터미널이 만나는 공항의 중심지, 넓은 광(廣), 마당 장(場)을 사용하는 한자 그대로 탁 트인 광장이 나타났다. 요새 세계 주요 공항의 시설이야 워낙 잘 갖춰져 있지만 현대식 시장을 옮겨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공항 안 스트리트 마켓에서는 음식, 기념품, 심지어 꽃까지 팔고 있었다. 네덜란드 답게 꽃가게 곳곳에서 각양각색 튤립들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보통은 백화점처럼 비슷한 위치에 브랜드나 상점명을 걸고 가운데 도보 양옆으로 가게들이 칸칸이 천편일률적으로 길게 늘어선 공항 면세점 특유한 분위기가 풍기기 마련이었다. 이곳을 지나는 동안엔 인테리어와 동선 배치가 자연스럽고, 실내 천장은 높고 안은 환하게 밝아서 지금 공항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정도였다.


F6이 어디인지 확인한 뒤 포르투갈의 역사, 문화, 예술, 경제 등을 집중해서 읽으며 한나절을 알차게 보낼 한적한 라운지를 찾았다. 스키폴 공항은 휴식 라운지가 곳곳에 많기도 했고 좌석 간 거리도 넓어서 쾌적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인데도 충분한 개인 공간이 확보되었다. 실내 가구는 소파, 바 테이블, 공원 벤치 등 다양한 모양이라 지루하지 않고 의자나 바닥에 나무 재질 또는 나무 무늬를 사용해서인지 편안했다. 내가 선택한 의자는 흰 가죽 시트에 좌우에 테이블로도 사용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널찍한 손걸이가 있는 형태였다. 좌석 자체도 넓어서 배낭을 좌석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스타벅스처럼 좌석마다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콘센트도 설치돼 있었다. 가보진 않았지만 은행이나 백화점 VIP 라운지에 있을 법한 좌석들이 넓은 휴식 공간 전체를 꽉 채우고 있으니 괜스레 이상했다. 건너편 휴식 공간에는 작은 간이 무대에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놓여있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왜 이렇게 스키폴 공항의 휴식 공간이 잘 되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런던 히드로, 파리 샤를 드 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럽 최대의 허브 공항답게 나처럼 환승을 기다리며 공항에서 장시간 머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공간에 이토록 많은 휴식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디자인이 발달한 나라답게 이용객이 좀 더 편안하게 느끼도록 섬세한 디자인 감각을 발휘한 결과물일 것이다. 5시간 정도가 흐른 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건너편 라운지에서 전신 의자를 발견했다. 전신 안마 의자처럼 각도를 조절한 뒤 아예 누워서 쉴 수 있었다. 이미 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채 편한 듯 불편해 보이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뒤 내 가설이 진실일 거라는 확신은 더 강해졌다. 아마 피아노도 지루함을 해소하는 용도로 설치한 것 같았다. 실수투성이라 부끄러워서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연주하지 않는데 하마터면 피아노 뚜껑을 열어서 못하는 연주를 온 사방에 펼칠 뻔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제력이 다하기 전에 탑승 시간이 다가와서 전 세계에 망신살이 뻗칠 일은 벌이지 않았다.




KLM 항공


스키폴 공항에서 오랜 기다림 끝에 네덜란드항공 KL0855편을 타고 10시간 30분 비행을 마친 뒤 마침내 나의 터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포르투갈로 가는 비행기에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귀국 비행은 단단히 준비를 했다. 주저 없이 몇 십만 원을 더 지불하고 미리 좌석을 프리미엄 이코노미로 업그레이드했다. 장시간 비행에서 10cm 더 넓어진 공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비행기 좌측 세 개 좌석 중 내 좌석은 복도 쪽 C열이었다. 창가 쪽 A열에는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성이 앉았다. 짐도 없었고 여행객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타자 마자 창문을 내리고 팔짱을 낀 채 잠에 들었다. 기내식 두 번을 모두 마다했고 화장실 한 번 가질 않았다. 익숙한 통학 버스나 통근 버스를 타듯이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 비행 루트가 익숙해 보였기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 한국에 거주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건가’라는 상상을 해봤다. 게다가 가운데 B열은 아무도 탑승을 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나름 비즈니스 좌석 같은 쾌적하고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거머 줬다.


포르투갈은 처음으로 ‘여기에서 살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나라였다. ‘유학을 떠나 공부를 더 한다’ 라거나 ‘풍부한 문화예술 인프라를 즐기고 싶다’라는 뚜렷한 목적이 존재하진 않았다. 그냥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기에 좋을 것 같았다. 다시 포르투갈로 향할 행운의 나날을 고대한다. 탐구하면서 포르투갈을 더 많이 알게된 만큼 그때는 지금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직조(織造)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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