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 그 후
여행에서 돌아온 뒤 빠르게 일상에 적응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아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기에 사실 적응할 것도 없었다. 귀국한 다음날에는 회사에 출근을 했고 며칠 뒤 추석 연휴에는 가족들을 만났다. 이듬해 가을에도 다시 유럽을 찾았다. 목적지는 스위스. 처음으로 동생과 둘이 여행을 떠났다. 그해에 동생과 여행을 동행한 일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4개월 뒤인 2020년 1월 발병한 코로나로 일상생활이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같이 떠나지 않았다면 동생과 외국에서 추억을 쌓는 일은 기약 없이 미뤄졌을 것이다.
스무 살 때부터 매년 짧게라도 꼭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15년 동안 지켜온 나만의 신조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외국은커녕 차로 1~2시간 걸리는 국내 여행도 가지 않고 완벽한 집순이로 변신했다.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을 제외하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집에서 이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은 결코 없는 것 같다. 혼자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종종 지난 여행 사진을 꺼내서 추억을 곱씹어 보고, 가끔은 ‘새롭게 무엇을 배워볼까’라는 생각도 든다. 문득,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놓여 있던 그랜드 피아노가 떠올랐다.
피아노 연주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나가다가 누구나 연주하라고 설치한 피아노에서 유려하게 연주를 하는 것이 꿈이다. 낡거나 조율도 잘 되지 않은 피아노 앞에 앉아 닫혀 있던 피아노 뚜껑을 열어 피아노 상태를 확인한다. 연주 전 손깍지를 껴서 손가락을 부드럽게 스트레칭한다. 처음에는 감성적이고 편안한 선율로 잘 알려진 쇼팽 녹턴이나 이루마의 연주곡을 몇 개 연주한다. 바삐 길을 가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멈춰 서서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연주를 할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서 어느새 피아노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마무리는 청중이 만족할 만한 화려한 곡을 골라 마음껏 연주 솜씨를 뽐낸다. 연주를 마치면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이내 나도,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미련 없이 제 갈 길을 간다. 이런 완벽한 연출은 최상의 시나리오이고, 현실적으로 두 곡 정도만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어도 좋겠다.
마침 동네에 성인전문 피아노 학원이 생겼다.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볼 때마다 하단에 #여긴몰랐지 라면서 배너 광고가 뜬다. 다른 광고를 쭉 훑어보니 특별히 관심사를 반영한 노출은 아닌 것 같다. 주변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여러 가게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어쨌든 더 정보를 얻고자 피아노 학원 배너를 클릭했으니 지역 타깃 광고는 성공한 셈이다. 링크를 타고 기존 수강생들이 남긴 후기도 몇 개 읽었는데 반응이 괜찮은 편이었다. 외출을 할 때 가끔 학원 앞을 지나갈 때마다 혼자서 의식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지금은 피아노 연주에 들일 시간이 없었고 좋지 않은 오른쪽 손목도 신경이 쓰였다. 대중 앞에서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고 싶다는 꿈은 허영심으로 가득 찬 욕망일 뿐이라고 깨달았다. 멋있어 보이곤 싶지만 노력은 기울이고 싶지 않은 전형적인 이기적인 심보였다. 하늘에서 일확천금이 뚝 하고 떨어지길 빌거나 다른 사람의 노력에 빌붙어 달콤한 열매만 취하고자 하는 무임승차와 다르지 않았다. 연주를 정말로 갈망했다면 여러 고민 없이 일단 시작부터 했을 것이다. 즐거우면 계속하고 예상과 다르면 중단하면 그만이었다. 여전히 이리 재고 저리 재며 뭉그적거린다는 건 ‘머릿속 생각과 달리 본심은 피아노 연주에 별로 관심이 없다’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한데 여전히 집착을 놓지 못한 채 질척거리고 있다. 이번에는 내가 바라는 수준으로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가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따져보았다. 무엇인가를 능숙하게 할 만하다 싶으려면 대략 1만 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믿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 K. Anders Ericsson이 주장한 ‘1만 시간의 법칙’ 때문만은 아니다. 한 회사에서 5년을 근무한 뒤 터득한 믿음이다. 지금까지 인생 중 꾸준히 연속적으로 한 일을 돌아보니 잘 먹고 잘 자는 생존 필수 활동을 제외하면 회사 생활이 유일했다. 지극히 평범한 일을 특별하다고 내세우는 것 같아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고백을 해보자면, 회사에서 3년 정도 지나니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5년이 되었을 무렵에 이제야 무언가를 독자적으로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주일 근무 40(시간) X 52(주) X 5(년) = 10,400 (시간) 이었다. 1년 52주 중에 공휴일, 연차 등을 고려하면 대략 3주 정도가 제외되고, 업무 능력을 향상하고자 자기계발에 투자한 개인 시간 등을 감안한 시간을 더하면 대략 1만 시간 정도로 딱 떨어진다. 이렇게 1만 시간 신화가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노력만으로 타고난 재능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는 결단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분야에 꾸준히 1만 시간을 들인다면 최소한 준전문가 반열에는 오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안고 살아간다.
앞으로 피아노 연주를 1만 시간 동안 연습한다고 가정을 해보았다. 어렸을 때 취미로 7년 동안 피아노를 배운 2,000시간 정도를 제하니 8,000시간이 남았다. 일주일에 5시간씩 일 년에 2주는 쉬고 50주를 연습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1년 연습 시간은 250시간, 8,000시간을 연습하려면 32년이 걸렸다. 한두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취미를 넘어서 최종 목표인 자유자재로 피아노를 다루는 준전문가 수준에 이를 때는 이론상으로는 거의 일흔 살에 가까운 나이였다. 물론, 1만 시간을 꼭 채울 필요는 없다. 당장 두세 달만 꾸준히 연습해도 한두 곡 정도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다시 피아노를 배운다면 중도 하차 없이 최소한 몇 년 간 꾸준히 실력을 갈고닦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시간 계산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어쩌면 죽기 직전에야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인생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적으로 시간을 계산해보니 인생의 끝까지 너무나도 짧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무엇인가를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작게라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인생은 유한하기에 미처 뜻하는 바를 다 이룰 수도 없겠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지금까지는 삶을 향해서 거침없이 나아갔는데 이제 몇 년 후부터는 정말로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죽음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이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우울해졌다.
결론적으로는 몇 년 안에 피아노를 다시 배울 셈이다. 1만 시간까지 연습할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그래도 언젠가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로비 한 켠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에서 자신 있게 연주할 꿈을 간직한 채 연습하고자 한다. 변명이 아니라 지금은 정말로 금전적, 심리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 상황에 다른 사람이 연습한 피아노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마음이 쓰인다. 한편, 걱정 없이 다시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을 때 마음속으로 그리던 포르투갈로 주저 없이 떠나야겠다라고도 다짐을 했다. 그때는 더 느긋하게 포르투갈 사람들과 대화도 주고받고, 그들의 아름다운 문화를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일단 그리운 마음만 포르투갈로 떠나보낸다. 공언한 대로 정말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지 아닌지도 그때 가면 증명이 될 것이다. 몇 년 뒤 어딘가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_피아노 연주 영상’이라는 영상이 올라오길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