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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07. 2021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법

휴가(休暇) 대신 휴가(休家)의 원칙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 낭독회를 다녀온 뒤 책장을 가만히 살펴봤다. <퀴즈쇼> 하나, <오빠가 돌아왔다> 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셋, <오직 두 사람> 넷, <2012 이상 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옥수수와 나 외> 다섯 – 책장에는 김영하 작가가 쓴 책 다섯 권이 꽂혀 있다. 아, <여행의 이유>까지 여섯 권이다. 강렬한 빨간 표지 <살인자의 기억법>, 삼부작 에세이 <쓰다>도 분명히 샀는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김영하라는 작가를 좋아하는구나. 이사를 하면서 책장이 줄어들어 많은 책을 버렸는데도 한 작가의 책이 여섯 권이나 책장에 꽂혀 있다니. 이후, <빛의 제국>, <검은 꽃>, 그가 추천한 <내 어머니 이야기>까지 사서 읽었으니 내가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내가 김영하 작가를 추앙한 계기는 엉뚱하게도 그의 ‘나는 호텔이 좋다’라는 고백 때문이다. ‘호텔을 좋아한다’라고 하면 왠지 야릇한 사람으로 오해할까 봐 괜스레 불안했다. 혼자 여행할 때 ‘게스트하우스나 한인 민박보다 호텔을, 다인실보다는 1인실을 선호한다’라고 하면 부유하거나 까탈스럽다고 오해할까 봐 말을 아꼈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나는 호텔이 좋다’라며 쭈뼛거리던 내 욕망을 대변했다. 앞으로 호텔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다. 나의 마음을 콕 짚은 문장 덕분에 나는 조금 더 홀가분해졌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홀연히 여행을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처음으로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익숙한 생활공간인 집에서 과연 진정한 휴가를 보내는 것이 가능할까 싶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재난 앞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대신 휴가의 속성을 고려해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 요리를 하지 않는다.

- 청소, 빨래도 되도록 하지 않는다.

  (미룰 때까지 미룬다.)

-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잔다.

  (잠이 오지 않는데 다음날 일과를 염려해 일부러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 평소 눈여겨본 새로운 식당과 카페에 간다.

- 영화와 책을 마음껏 본다.

- 책은 인터넷이나 대형 서점이 아닌 동네 서점에서 산다.

- 하루 1만 보 이상 걷는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시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집에서 휴가지의 일과를 비슷하게 따라해 보기로 했다. 가사 노동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걸어서 새로운 장소에 가고,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 배우자에게 내가 세운 원칙과 계획을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휴가 기간에 가급적 사소한 요청도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휴가 첫째 날, 몇 달 전부터 가고 싶던 음식점에 갔다. 초두부, 순두부, 두부덮밥, 두부전골 등을 파는 두부 요리 전문점이다. 주문한 초두부는 맛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맛있지도 않았다. 직원의 응대와 서비스도 별로라서 식사하는 내내 불편했다. 담백한 밑반찬 다섯 가지를 제공하고 가격도 더 저렴한, 집에서 가까운 단골 두부 전문점이 떠올랐다.


식사를 마치고 앱에서 추천하는 저택을 개조한 브런치 카페에 갔다. 키오스크가 오류가 나서 몇 번의 결제 실패 끝에 간신히 주문했다. 한창 붐빌 시간인데 넓은 매장에 직원이 고작 한 명이었다. 삼십 분을 기다려서 받은 비싼 청포도에이드는 맛이 없었다. ‘커피가 맛있고 분위기가 아늑한, 집에서 가까운 단골 카페를 갈 걸’ 후회했다. 한편, 낯선 장소에서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니 오히려 그 불만족감 때문에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늘 지나치기 바빴던 동네 독립책방에도 갔다. 책방 주인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서재를 둘러봤다. 저자의 유명세와 각종 광고, 프로모션의 그늘에 가려진 새로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신선한 자극을 받고 기분을 전환했다. 모처럼 독립출판 에세이 한 권과 얇은 시집 두 권을 집어 들었다.


하루는 지도 앱에서 산책할 녹지를 찾다가 창릉천을 따라 조성한 공원을 발견했다. 지축역에서 가까워 보였는데, 막상 도착하니 사방은 온통 공사 중이었다. 공사장을 가로지르면 바로 창릉천인데, 통제 구역이라 건너갈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헛걸음했다며 자책했을 텐데, 휴가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망한 경험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처음 시도한 휴가(休暇) 아닌 휴가(休家)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완전히 새롭진 않지만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고, 가보지 않은 서울의 좋은 장소는 널렸다. 숙박비와 교통비가 들지 않으니 남는 휴가비로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 식도락을 만끽할 수 있다. 익숙한 안정감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집에서 보내는 휴가는 편안하지만 땟국물이 덜 빠진 기분이랄까. 미적지근하게 85% 재충전된 스마트폰 같달까. 희로애락이 서린 일상 공간이 내뿜는 일종의 매너리즘 기운은 강력했다. 왜 구태여 나 자신을 여행이라는 명목으로 정기적으로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낯선 환경에 떨어뜨려 왔는지 알 것 같다.


여행의 다른 이름은 적응이다. 낯선 곳에서 적응하기. 익숙한 환경에서 생활할 때 자각하지 않던 생존본능이 작동한다. 포식자의 위협을 감지하려고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미어캣이 된 기분이다. 주변은 안전한지, 경계할 사람은 없는지, 식사는 어디에서 할지, 숙소 가는 방향은 어디인지 평소 신경 쓰지 않던 것에 일일이 기운을 쏟는다. 습관에서 벗어나 행동하다 보면 에너지를 빨리 소모해 시답잖은 고민이 찾아올 겨를이 사라진다. 머리를 비워내고 마음을 정화해 홀가분해진다. 그러나 집처럼 익숙한 공간에서 예측 불가한 기대를 하기는 쉽지 않다.


이래저래 흘려보낸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던 지난날은 얼마나 소중했던가. 미래의 소중한 과거일 오늘, 넋두리를 하는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인생에서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가장 소중하길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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