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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Oct 13. 2021

피카소의 초기 작품을 보고 당황한 이유

기초는 기본이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참 독특하다. 집에 걸려있던 평범한 줄 알았던 그림을 어느 날 가치를 인정받아 유명 미술관에 전시한다면? 인테리어 장식이던 그림에서 무대에서 집중 조명을 받는 주인공 같은 특별한 아우라가 느껴질 것이다. 평소 신경 쓰지 않던 그림 속 붓 터치 하나도 달라 보이고,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며, 작품에 계속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 것이다. 미술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가슴에는 갑자기 예술적 감수성이 차오르며,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끌어올려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 이처럼 공간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이십 대에는 미술관 도슨트 자원봉사를 할 만큼 미술관을 꽤 들락거렸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사실은 업무만으로도 벅차서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이 귀찮아 미술관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졌다. 코로나가 확산하고는 입장 인원을 제한하기 위한 사전 예약이 필수라서 미술관 문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래도 선호하는 전시를 말하자면 특정 예술 사조나 주제에 집중한 기획전보다 작가 한 명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는 ‘작가전’을 더 좋아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작품 소재와 양식을 보면서 한 사람의 인생사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흥미를 일깨워준 첫 번째 전시회는 200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파블로 피카소 展’이다.


작가전인 만큼 연대기별로 피카소의 대표작을 전시했는데, 초기 작품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역시 천재답게 일찍이 작품이 남달리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기존 화가의 그림과 너무 똑같아서, 내가 알고 있는 큐비즘 양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가족과 지인의 초상화, 자신을 그린 자화상, 일상생활을 포착한 장면 등 현실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전통적인 회화에 충실한 작품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피카소가 그렸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분명히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등 인상주의와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등 바로크 회화 전시로 착각했을 것이다. 물론, 기존 방식을 따르더라도 안정적인 구도와 세밀한 묘사, 독특한 색감, 적절한 빛의 활용 등 작품마다 완성도가 높아서 보는 이의 눈길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파블로 피카소는 입체파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본 시각을 하나의 평면에 재구성해 표현했다. 단순하고 얕은 사고로 전시회를 보기 전까지 피카소는 처음부터 <아비뇽의 처녀들(1907)>, <게르니카(1937)> 같은 작품을 그린 줄 알았다. 더 솔직하게는 그는 사진을 찍듯이 현실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피카소는 일찌감치 기존 기법을 모방한 뛰어난 그림 실력을 선보였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며 차츰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모색했다. 미술사에서 혁신적이라고 평가하는 큐비즘은 바로 그 결과이다. 예술 작품을 관찰과 사고(思考)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기존 화풍을 따라 하는 것은 화가에게 기초적인 작업일 텐데 오해했다.


First Communion(1986), Museu Picasso, Barcelona, Spain, 166x118cm


Science and Charity(1987), Museu Picasso, Barcelona, Spain, 197x249.5cm




이를 계기로 현대 미술은 물론이고 누군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했을 때 ‘그건 나도 하겠다’, ‘쓸데없이 그런 걸 왜 하는 거야?’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않기로 했다(최근 현대 미술은 작품보다 해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결과물이 비록 이상하고 불완전한 허섭스레기로 보이더라도 창조자가 지닌 역량과 능력이 하찮다고 폄훼하지 않기로 했다. 피카소도 처음에는 기성 예술가를 모방했듯이 새로운 허섭스레기를 만들어 낸 사람도 짜인 체제 안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혹평받을 일 없이 기성 체제에서 안정적으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선보였을 때, 무조건적인 지지자였던 동료조차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시원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결과물을 냉정하게 평가하더라도 드러나지 않은 치열한 고민의 과정과 노력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니 비로소 사람과 작품이 나의 내면에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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