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문자를 받고 든 생각
봄은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지만,
나에게 작년 봄은 장례식으로 기억된다.
친구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연거푸 듣게 되었다.
봄에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거의 매주 부고 소식을 듣다 보니
솔직히 마지막 부고 연락을 받았을 때는
정신이 꽤 고갈된 상태여서
‘아…… 이건 좀 가혹하잖아’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나도 안다.
죽음이 예약하고 찾아오진 않는다는 것을.
모든 부고 문자는 보내는 이도 당혹스러울 만큼
갑자기 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죽음은 공평하게 안타까운 줄 알았는데
불현듯 받게 되는 부고 연락에
‘이 친구는 열 일을 제쳐 두고 가서 위로해야 해’
‘이 분은 발인에도 참석하고 장지까지도 다녀와야겠어’
‘이 분은 조의금을 좀 더 넉넉하게 해야지’
‘이 지인은 이따 저녁에 가서 얼굴 비치고 조의금 내고 육개장이나 한 그릇 먹고 와야겠다’
‘이 분은 계좌로 조의금이나 좀 보내야지. 문자에 계좌번호가 있어서 다행이야’
라며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
현실에서는 죽음의 무게도 전부 다르구나 싶다.
작년 봄에 참석한 장례식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을 만큼
열 일을 제쳐 두고 위로해야 하거나
장지까지 같이 다녀오거나
먼 거리라도 꼭 가서 위로하고 싶은
오랜 친구들에게서 받은 연락이었다.
돌아가신 분의 오랜 투병 과정을 알고 있거나
남은 가족들과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거나
엊그제도 만나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을 만큼
가까운 관계의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었다.
장례식장을 가는 마음은 매번 무겁지만
친분이 깊은 사람과 관련된 장례식장을 찾을 때는
그 사람의 감정과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만큼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는 역할의 비중도 커졌다.
그래서 실은 작년 봄 끝 무렵,
나 또한 거듭 전이된 묵직한 슬픔의 무게를 견디고
마음을 나누느라 소진된 감정을 추스르느라
별일 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흘려보냈던 것 같다.
20년 동안 연락이 끊긴
얼굴과 이름과 인상만 어렴풋이 기억 남는
지인의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위로의 문자를 보내고
계좌로 조의금을 부쳤는데,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지는 않는다.
생(生)을 살아가는 동안
생(生)을 살아가는 이에게
죽음의 무게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