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그리고 ‘행운과 불행’의 교차 지점
감기에 걸렸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무거웠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일어난 지 30분도 채 안 됐는데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평소와 다른 찌뿌듯한 몸으로 책 읽기를 반나절, 이제는 목도 아프고 콧물도 나고 기침도 한다. 그런데 감기가 낯설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코로나에도 끝끝내 감염된 적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감기에 걸린 게 4년 전이었나, 5년 전이었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감기는 오랫동안 일상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그사이 내가 모르는 감기 치료법이 개발되었나 싶어서 구글에 검색을 했다. <감기 빨리 낫는 법>. ‘감기를 치료하기 위한 특정 치료제가 있지는 않습니다. 충분한 휴식과 수분, 영양섭취를 하면 성인의 경우 보통 5~7일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집니다.’ 역시나 감기 치료에 왕도는 없었다. 푹 쉬고 잘 먹고 잘 자면서 떨어진 면역력을 회복하는 데는 결국 시간이 약이었다. 어렸을 때는 콧물 나고 기침하면 곧잘 병원에 가고는 했는데,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이 심리적 안정제는 될 수 있어도 감기 치료의 본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서는 병원에 가지 않게 되었다. 대신 마트에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는 생강차와 쌍화탕, 비타민이 풍부한 레몬과 오이고추를 사 왔다.
감기에 너무 오랜만에 걸려서였을까. 전자레인지에 데운 따뜻한 쌍화탕을 먹고, 끼니마다 씨가 잔뜩 든 오이고추를 몇 개씩 먹고, 직접 만든 레몬차를 마시고, 집안이 건조하지 않도록 계속 빨래를 널어놓고, 자기 전에 손수건으로 목을 따뜻하게 감싸는 등 평생 체득한 감기 대처 노하우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잘 자고 잘 먹고 목이 건조하지 않도록 따뜻한 차를 마시고 집안의 먼지마저 모조리 청소해서 없앴는데도 감기는 야속하게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겨울잠이라도 자려는 듯 잠은 계속 쏟아지고 무엇보다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심리상담 수업에서 선천적으로 지능이 낮아서 학습 능력의 한계가 분명해 마음먹은 일을 할 수 없는 내담자를 바라보는 안타까움을 들은 적이 있다. 기력이 달리니 어떻게 이럴 수 싶을 만큼 집중력이 떨어져서 책 한 장을 읽고 이해하는 데 30분이 넘게 걸린다. 배우고 도전하고 싶어도 타고난 한계 때문에 제약이 많은 삶을 살고 있을 그 내담자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책 읽기를 비롯한 모든 생산적인 활동하기를 그만두고 두 눈을 감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기로 했다. 목도 잔뜩 부어서 누군가와 말 한마디 하기도 힘겹고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누워서 귀를 열고 팟캐스트를 ‘듣는 것’이 전부였다. 몇 날 며칠 하루 세끼 영양소 골고루 잘 챙겨 먹기가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일과였다. 감기로 사람이 이토록 무력해질 수 있다니. 아마도 감기가 아니라 독감이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코로나 시대가 찾아오기 전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감기에 걸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연례행사처럼 여름이나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었을 때 일주일 정도 독한 감기를 앓고, 중간에 콧물이 좀 나고 목이 약간 붓는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는 약한 감기가 또 한차례 지나가곤 했다. 전 국민이 위생과 방역 관리에 철저한 코로나 시기에 처음으로 사람이 일 년 동안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고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몇 년 동안 학습된 결과로 사람과의 접촉을 자제하고, 외출할 때는 꼭 마스크를 착용하고, 귀가하면 손발을 깨끗이 씻고, 몸이 약간 이상하다 싶을 때 충분히 휴식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어쩌면 평생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며 자기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는데, 이번 겨울, 감기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며칠을 된통 앓으며 병석에 누워 지내고 보니 이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감기에 한 번도 안 걸린다면 좋아할 동안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체계가 얼마나 약해졌는지 고작 감기로 일상이 마비되고 말았다. 좋다고 생각한 일이 결코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꼈다.
‘사필귀정(事必歸正)’과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두 사자성어를 좋아해서 한동안 좌우명으로 삼고 생활신조로 여긴 적이 있다. 사필귀정은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귀결된다’는 의미이고, 새옹지마는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옳고 그름을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 세상일이 별로 많지 않다고 알고부터는 사필귀정에는 점차 의미를 두지 않고 있지만, 살아갈수록 새옹지마가 담고 있는 혜안은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새옹지마는 유명한 사자성어이지만 그 유래를 간단히 살펴보면, 옛날에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기르던 말이 도망쳐서 낙심했다. 그런데 몇 달 뒤 달아난 말이 뜻밖에 준마 한 필을 데리고 돌아와서 마음 사람들이 축하했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자 노인은 다시 낙심을 했다. 얼마 뒤 전쟁이 일어났는데 다리가 부러진 아들은 전쟁에 끌려가지 않고 죽음을 변할 수 있었다. 모순적인 것 같지만 ‘화 속에 복이 있고 복 안에 화가 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나는 새옹지마를 10대 후반에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고3 때 아버지가 큰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 불행한 일이 나에게, 우리집에 찾아왔을까 싶었는데, 대학 입시 면접에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의 사고에 대한 나의 감정과 불운함을 털어놓아 설득력을 얻고 다소간의 동정심을 받을 수 있었다. 꼭 이 대답 때문에 합격의 기쁨이 주어진 건 아니겠지만, 몸은 성인이라도 아직은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이 필요한 10대 청소년이 아버지의 사고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을 딛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공부에 전념한 데 동정과 연민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면접관은 없었고,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곤란한 추가 질문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이때 평소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가 몇 번의 수술과 몇 년의 입원 때문에 집을 비워서 난생처음 집에서 긴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사고가 우리집의 큰 불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평온한 일상에 적응을 하자 점차 ‘과연 이것이 나에게도 불행이기만 한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불행한 사고를 면접에서 유리하게 이용했다는 나의 이중성에 대한 부끄러움과 혐오감, 공부한다는 핑계로 아버지 면회를 한 번 밖에 가지 않은 오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죄책감은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지배해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엄마처럼 을이 되기를 강요받는 숨 막히는 결혼 생활을 원래 결혼은 그런 건 줄 알고 견디다가 상대방의 어이없는 강력한 이혼 요구를 계기로 결국 마무리 짓게 되었다. 그때는 또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라며 더없이 불안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혼을 계기로 접한 심리상담 덕분에 오랜 꿈이던 책도 출간하게 되었고, 상담심리학이라는 생각지도 않은 공부를 하며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결혼, 가족, 부모, 사랑, 우정, 인간 등에 대해 성찰하며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불운하다고 생각한 일이 다시 행운이 되고, 행운이라며 좋아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 불행의 씨앗이었음을 알게 된 경험을 몇 번 반복해서인지 예전보다 덜 일희일비하게 된 것 같다. 기쁜 일이 기쁘지 않고, 슬픈 일이 슬프지 않으며, 아픈 일이 아프지 않고, 힘든 일이 힘들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힘든 일이 찾아오면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이번엔 하늘이 나에게 무슨 깨달음을 주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이런 일을 겪게 하는 걸까’라는 생각으로 견뎌낼 것 같다. 남들이 하나 같이 잘 된 일이라며 보내는 축하와 박수에 쉽사리 휘둘리며 들뜨기보다 ‘그래서 그 운이 좋은 일에 나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내 진짜 감정과 속마음은 무엇인지, 이번 행운이 나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인지’가 더 중요해진 것 같다. 너무 큰 고통은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완전무결하기보다는 면역력을 키우는 가벼운 감기처럼 평소에 소소한 괴로움과 약간의 근심, 걱정이라는 예방 주사를 수시로 맞으며 사는 것이 인생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