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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May 22. 2020

내가 오늘도 글을 쓰는 이유

수백 개의 남겨진 댓글에서 얻은 깨달음

이후, 어머님의 반찬을 둘러싼 우리 부부 각자의 입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관련 글: 시어머니의 반찬이 싫은 이유 https://brunch.co.kr/@smilepearlll/29) 우선 나는 ‘보내시는 건 어머님의 자유인데 어쩔 수 없는 거지. 먹고 싶은 건 먹고, 먹지 않아서 남는 건 버리면 되는 거고. 아까워도 어쩌겠어. 만들어서 보내는 게 힘들지, 받아 두는 게 뭐 어렵다고.’라며 이 문제를 남편이 생각하던 것처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반면, 남편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반찬 중 상당수를 자신이 먹지 않고, 아내인 내가 아무리 열심히 먹더라도 몇 달 동안 냉장고에 보관이 되어 있다가 결국 음식물쓰레기로 전락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을 했다. 내가 바랐던 것처럼 반찬을 정말 조금만 받아오거나 어떨 때는 어차피 먹지 않는다며 챙겨 주시는 것을 사양하는 경우도 생겼다. 부부가 닮아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한편으로, 어머님께서 반찬을 보내시는 건 손에 꼽는 일이기도 하다. 친정 엄마는 내 성격을 아셔서 아예 보내실 생각을 하시지를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와 같다. 글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니 글을 쓴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공감, 반박, 재반박을 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알게 되고,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이해하고 수용하는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맞을 수도 있다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깨달으면서 앎의 확장을 통해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글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결혼 생활, 회사 생활을 하다 겪는 정답이 없는 문제들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읽고 이해해 주길 바랐다. 내 생각과 마음에 공감해주기를 바랐다. 또한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가 멋있어 보였다. 글을 쓰니 신기하게도 생각이 차분하게 정리가 되면서 보일 것 같지 않았던 문제들에 정답이 아닌 나만의 답이 보이길 시작했다. 답답하다고 느꼈던 감정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몇몇 경험으로 어쩌면 내가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주말에 레몬청을 담그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아, 행복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와 의견을 교류할 필요도, 생각이 달라 갈등이 생길 일도 없어 얼마나 마음이 고요할 수 있는지.’


어쩌면 하루 종일 레몬청을 담가서 생활비를 벌고, 저녁과 주말에 개인 시간을 갖는 것이야 말로 내가 바라는 평온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한 삶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레몬청을 만드는 삶은 나 스스로는 평온할 수 있으되 사회의 발전이나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는 미미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는 글을 왜 쓰는 것일까. 나에게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재미이자 표현이다. 하지만 레몬청을 만드는 것과 비교를 하자면 글쓰기는 꼭 재밌기만 하지는 않다. 우선, 글쓰기는 너무나도 많은 두뇌 활동을 필요로 한다.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되 설득력을 갖추려면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 시청각의 여러 자료를 찾아본 후 수긍, 분석, 비판, 상상을 하는 ‘생각’의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때로는 글의 소재나 근거로 삼기 위해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나 사람,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과정은 오히려 감정이 해소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무거운 마음이 되살아 나 괴로울 때도 있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짜릿하다. 내가 쓴 글을 매개로 독자와 생각을 주고받는 소통을 한다는 건 떨리면서도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흥분되는 일이다. 이 점이 공개적인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이지 싶다. 한편으로 누군가의 맞는 지적에는 나의 민낯을 고스란히 내보인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 어디에나 비판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에 마음이 바로 진정이 되진 않는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무례한 말이 비수로 꽂힐 때는 무시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의 감정이란 게 기분이 언짢은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반복하는 게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내가 추구하는 안분지족 하는 삶은 레몬청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히 충족이 될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수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글쓰기에 소질이 있는 거라면? 이 경우엔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쓰고 싶지 않더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미쳤다. 우선,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여러 활동 중 글쓰기만큼 쉽고 간편에게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쳐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까. 특히, 내 글에 남겨진 공감, 자신의 상황, 다르거나 또는 반대하는 의견, 비난이 담긴 댓글을 읽고 있자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공감하거나 재밋거리로 읽고 지나갈 것이고, 누군가는 내 글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화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당장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읽었던 글의 내용이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때 행동을 바꿔서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말과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어머니의 반찬을 두고 나와 남편이 시나브로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여 상대방이 주장했던 행동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결코 레몬청 만들기나 레몬청을 상품화해서 판매를 해 돈을 버는 게 쉽다거나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글쓰기가 레몬청 만들기보다 더 가치 있고 숭고하다는 얘기도 아니다. 오해는 금물이다. 다만,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한 글쓰기이지만 점차 글 쓰는 실력이 향상이 되는 걸 느끼면서(자뻑이 아니길 바라며)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중에 ‘나에게는’ 레몬청을 만드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더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씩 내가 작성한 글에 공감, 반박, 반박에 다시 반박하는 다양한 관점을 지닌 댓글 의견이 남겨지는 걸 보고 있자면 서로 다른 생각이 만나는 ‘장(場)’을 만든 것 같아 뿌듯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가끔씩은 나의 사고(思考)를 뛰어넘는 글의 반응에 떨리고 아프고, 글을 쓰는 동안은 힘겹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도 나는 재미와 더불어 스스로에게 약간의 의무감을 부여 해 글을 쓰고 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마음이 더 단단해져 가는 것, 왠지 좀 멋있어 보이는 건 덤이다.


스위스 남부 루가노의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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