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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Feb 16. 2024

‘내가 그렇게 만만해?’ 900원 때문에 폭발하다

불안정한 인간관계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기나긴 이야기(1)

외로워서 하는 연애가 전부 쾌락주의적으로 아무나 쉽게 사귀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이때는 ‘나도, 쟤도 호감은 별로 없는데 외로워서 서로에게 기대고 있구나’라는 자각은 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나름대로 노력해서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고 믿었는데, 실은 외로워서 아무에게나 손쉽게 마음을 열고 인간관계를 맺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자꾸 빠져드는, 휩쓸리기 쉬운 내면이 불안정한 사람이다. 초록색 안경을 마침내 벗어던지고 사실 에메랄드 시는 에메랄드 빛깔이 아니라고(관련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352) 깨닫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풀어보려고 한다. 이혼 뒤 1년 동안 새롭게 알게 되었지만 지금은 지인의 범주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부제는 ‘엄마 찾아 삼만리’이다.




기다리던 택배가 도착했다. 친구들에게 선물할 디퓨저를 만들 재료를 주문했다. 디퓨저 베이스 잘 왔고, 프레그런스 오일 있고, 용기, 스티커, 상자 그리고 스틱…… 이 허접한 산타는 뭐야? 분명히 트리 모양 스틱을 주문했는데? 잘못 주문했나? 주문장을 꼼꼼히 살펴보니 ‘죄송합니다. 트리는 재고가 소진돼 산타를 보내드립니다’라고 급하게 갈겨쓴 글씨가 쓰여 있다. 재고가 없으면 미리 알리고 다른 제품으로 보내도 될지 물어야지. 아직도 일방적으로 장사하는 데가 있나?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산타, 트리, 루돌프, 행복한 집 중에서 얼마나 고민해서 고른 건데. 기분은 상했지만 재고가 없는데 어쩌겠나 싶었다. 그런데 막대 모양 기본 스틱 묶음도 하나가 덜 왔다. 대체 여기는 장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업체의 부주의로 ‘빠뜨린’ 스틱 묶음만큼은 제대로 받고 싶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둘째 날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셋째 날 마침내 통화를 했고,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또 연락이 없다. 며칠 전 통화했는데 잊으셨나 싶다며 공손한 문자를 보낸다. 아무런 답이 없다.


1,000원도 안 되는 스틱 묶음을 택배로 보내면 배송비가 더 나오고, 업체 입장에서는 큰 실수도 아니니까 이런 사소한 손님의 클레임은 무시해도 그만이겠지. 나도 품질 차이도 없는 이깟 스틱, 3분 거리 집 앞 다이소 가서 900원 내고 사면 그만이었다. 기분은 언짢지만 며칠씩 끌어안고 끙끙 앓으며 스트레스에 시달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업체의 실수로 못 받은 스틱 묶음을 꼭 절차대로, 정당하게 받고 싶었다. 산타와 트리, 루돌프와 행복한 집 사이에서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내가 들인 정성과 시간을 무시해도 양해했잖아.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해. 스틱 묶음이 제대로 왔으면 다이소에 갈 일도, 900원을 더 쓸 일도, 클레임 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일도 없었잖아. 보상받고 싶어. 스틱 묶음을 못 보내겠으면 900원이라도 환불하던가. 스틱을 다시 사느라 괜한 900원을 날리고 싶지 않아. 나를 무시한 사람은 남편 하나로도 충분해. 그 예민하고 자존심 센 인간에게 호구처럼 저자세로 맞춰 산지도 몰랐던 나는 더 이상 없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어. 그러니까 스틱을 보내든, 계좌로 환불을 하든 제대로 처리를 하라고. 이 XXX야. 평소 나답지 않은 분노와 우울을 오가고, 가늠할 수 없는 배우자의 돌발 행동과 발언에 나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시험하며,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자 매 순간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처음 경험하는 이혼 과정이었다.




남편과 별거를 하고 한 달 걸리는 협의이혼의사 확인기일을 기다리는 동안 연말이 지나서 새해가 찾아왔다. 그리고 낯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진주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서점 한 번 온다더니 언제 올 거예요? 기다리고 있어요. 집에서 멀지도 않잖아요. 시간 내서 한 번 와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최근에 업무 때문에 만나서 길게 이야기를 나눈 동네책방 사장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한두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지만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사람치고 너무 갑작스러운 연락이었고, 경계심을 완전히 허문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갔다. 훅 들어온 친밀한 화법에 이때 이미 낯선 사람이 아는 사람을 거쳐 친한 관계가 되는, 사람을 사귀며 차차 좁혀가는 거리감 조절에 실패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관계의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버리고 휘둘릴 예열을 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동네책방 운영자였기 때문이다. 동네책방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따뜻하고 친근한 공간이라는 인식 때문에 쉽게 관계의 문턱을 낮추고 경계심을 늦추었던 것이다.


며칠 뒤 방문한 서점은 아늑하고 따뜻했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옆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햇볕을 쬐니 노곤해지고, 다친 마음이 소독되는 것 같았다. 향긋한 책 내음도 좋았고, 온라인서점에서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책을 발견했고, 차와 디저트는 맛있었으며, 사장님과의 편안한 대화도 즐거웠다. 대화를 나눌수록 가치관이 비슷하고,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동네의 사랑방이 되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역할을 하도록 이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을 기울이는지 진솔하고도 적나라한 사연은 흥미로웠고, 처음 듣는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서 새삼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소신을 지키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현실에서 실행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책을 읽다가 동네책방을 오가는 손님을 구경하거나 단골손님과 사장님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도 있었다. 순수한 손님으로 방문했을 때 그와 나의 관계는 평등했고, 그곳은 만족스러운 위로와 위안의 공간이었다. 프리랜서로 하던 일도 끝났고, 매주 심리상담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할 일도 없어서 당분간은 매주 편안하고 안전한 이곳에서 나 자신을 치유하는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책방에서 작은 프로그램을 맡아 운영하기로 하면서 사소한 균열이 일어났다. 당시에 나는 주어진 일을 잘 해내는 데서 벗어나서 오로지 내 동기에 의해서 무언가를 기획하고 운영해서 해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시키면 300석 규모의 대규모 북콘서트도 성공적으로 운영해 내고, 분명히 누구보다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도 이를 만일 오직 내 필요에 의해서 기획/운영한다면 이유는 모르지만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타의에 의해서, 타인의 욕구와 기준을 만족시키는 데는 능숙하지만 희한하게 같은 일을 자의로 할 때는 너무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동기가 부족해서인지 끝까지 못 밀어붙이고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이러다 평생 타인의 기준에만 부합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닌지 고민이 많던 시기에 이 책방에서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할 기회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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