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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04. 2020

스마트폰이 고장이 났다. 여행 사진을 다 날려버렸다!

아이폰 무한 사과 오류가 남긴 교훈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었는지, <대화의 희열> 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북콘서트에서였는지. 김영하 작가는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여행지의 소리를 녹음해서 다시 들어본다고 했다.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여행을 곱씹고 기억해보려고 한다고 했다.




스위스를 여행할 때였다. 베기스 선착장에서 루체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기스는 루체른 호숫가에 있는 작고 예쁜 마을이다. 유명 관광지인 리기 산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이 마을에서 탈 수가 있다. 루체른에서 배로는 1시간 가량 걸리고, 루체른에서 기차를 탄 후 버스로 환승을 해서 갈 수도 있다.


오전 11시 30분, 베기스의 날씨는 먹구름이 잔뜩 낀 채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며 우중충했던 어제, 그제와는 사뭇 달랐다. 티끌 하나 없이 유난히 화창한 날씨였다. 따뜻한 가을볕이 내리쬐었고, 햇빛이 물에 반사돼 호수는 반짝반짝 빛나는 별로 가득 찼다.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아마도 배를 기다리는 짧은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손에 꼽는 행복한 순간으로 기록이 될 것 같았다.


선착장 옆의 작은 광장에서는 할아버지 악사 두 분이 키보드와 아코디언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벤치에 삼삼오오 앉은 어르신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연주를 감상을 했다. 흥에 겨워 음악에 맞춰 커플 댄스를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 공무원으로 짐작되는 분은 쟁반을 들고 벤치를 돌아다니면서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다.’


더 정확하게는 그 순간의 행복한 기분을 간직하고 싶었다. 참! 녹음이 있었지. 스마트폰을 꺼냈다. 처음에는 녹음이 잘 되는지 테스트 겸 악사들의 연주를 40초 정도 녹음을 했다. 5~6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녹음 품질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다음에는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3분 48초를 녹음을 했다. 알고 보니 마지막 연주였다.


녹음 파일을 들어보니 악사들의 연주와 노랫소리는 물론이고, 노래 중간에 배가 출발하는 것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 동네 개가 ‘왈왈’ 짖는 소리, 지나가는 사람의 옷깃이 부딪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기록이 돼 있었다. 너무나도 기억을 하고 싶은 순간이라 남은 스위스 여행 중에도 행복한 꿈을 꾸길 기도 하면서 거의 매일 같이 들으면서 잠에 들었다.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적으로 힘겨울 때마다 음질도 썩 좋지 않은 3분 48초짜리 음악이 늘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녹음 파일이 유일하게 저장돼 있던 나의 아이폰은 무한 사과 증상에 걸려서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라 공들여 찍은 사진들도 전부 백업 전이었다. 사진도 사진이거니와 내 마음의 위로제였던 3분 48초 녹음 파일을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기억의 한 부분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만 같았다.

(무한 사과 증상이란, 아이폰을 껐다 켰을 때 로딩이 3/5~4/5 정도 되다가 다시 꺼졌다 켜진 후 재 로딩되면서 이 오류가 반복되는 것을 말한다. 로딩바 위에 애플 공식 로고인 한입 베어 문 사과가 그려져 있다. 원하는 대로 제대로 부팅은 되지 않은 채 로딩바와 공식 로고인 이 사과 문양이 나오는 화면이 무한 반복되면서 희망 고문 끝에 사람을 지치게 한다.)


아래로는 구름이 내려다보이던 리기 산의 정경, 숙소에서 베기스 선착장까지 이어진 아기자기하면서도 고즈넉한 길, 따뜻했던 햇살, 호수에 별처럼 빛나던 햇빛, 음악에 맞춰 흥겹게 커플 댄스를 추던 사람들, 활기찬 표정으로 키보드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악사들, 사람들에게 와인을 나눠주던 시 공무원까지……

사진은 사라졌어도 그날의 풍광은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림 실력이 젬병이라 도화지에 스케치를 할 수는 없더라도, 내 눈앞에, 내가 생각한 모든 광경은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악사들의 연주, 뱃고동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에 빠진 것만 같았다. 떠올리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생각이 나질 않아서 상실의 공허함과 슬픔이 더해질 뿐이었다.


이미지(사진)와는 달리 소리(음악)를 들을 때는 그날의 정취와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사진을 볼 때는 ‘맞아. 이때 여기를 갔었지. 참 좋았어.’라고 과거의 추억을 곱씹는 데서 그치는 것 같다. 녹음된 소리를 들을 때는 비록 지금 몸은 서울에 있지만 정신은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진이 과거의 기억이라면, 소리는 현재 진행 중인 상황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소리 속의 시공간에 내가 들어가서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잠시 잠깐이지만 그 착각이 나는 참 좋았다. 소리를 잃었다는 건 단순히 녹음 파일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따뜻했던 햇살, 그 날의 온기와 유쾌하면서도 고즈넉했던 정취, 내게는 그 모든 것의 상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마트폰의 무한 사과 오류를 고쳤다. 그 대가로 백업하지 않았던 모든 데이터는 사라졌다. 기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 백지상태로 새 휴대폰이 되어서 돌아왔다. 나의 마음과 기억은 이미 예전 그대로가 아닌데, 자신은 힘들고 아팠던 기억은 다 잊었다면서, 우리는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옛 연인이 돌아와서 말을 한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나에게 이럴 만한 옛 연인은 없으므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장담한다.)


안타깝게도 새단장을 한(이라고 쓰고 ‘백지상태가 된 바보’라고 읽는다.) 예전 스마트폰은 다시는 나의 동반자가 되지는 못했다. 데이터 복구를 장담하지 못한 채 기약 없이 수리 센터에 맡긴 동안, 결국 최신 스마트폰을 장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상관이 없었는데 휴대폰 없이 생활하는 기간이 일주일이 넘어가니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남편은 집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나와 하루 종일 연락이 닿지를 않으니 때때로 걱정하는 눈치였다. 회사 사람들과 업무 관련한 분들께는 계속 누군가를 통해서 필요한 사항을 전달을 받게 되니 민폐였다.


또래들에 비해서 기계에 좀 약했던 편이다. 업데이트의 중요성을 모른 채, 평소 스마트폰 업데이트를 게을리했다. 아이폰의 아이클라우드(iCloud)도 몇 년 전 백업이 최신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웬걸! 새로운 스마트폰 동기화를 진행을 하니, 기본 5GB 내에 사진을 제외한 최신 연락처, 메모, 그리고…… 음성 메모가 남아 있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떨리는 마음으로 음성 메모 앱을 열었다.


2019.09.03 스위스 베기스 아코디언 연주   00:40

2019.09.03 스위스 베기스 아코디언 연주2  03:48


있었다! 베기스 연주 녹음이 살아있었다!!

(내가 직접 백업을 안 해도 자동으로 백업이 이뤄졌었나 보다. 음…… 기계에 좀 약한 게 아니고 많이 약했던 것 같다. 사건을 겪은 후 새 스마트폰을 구입을 하자마자 유료 결제를 해 아이클라우드 저장 공간을 50GB로 용량을 늘렸다. 월에 고작 1,100원이 부가되었다. 한 달만 먼저 월 1,100원 결제를 했더라면…… 마음이 아팠다.)


재생을 해보니 내가 그토록 떠올리려고 애썼던 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악사들의 연주, 뱃고동, 개 짖는 소리 등등…… 행복했던 그 날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 곳곳에 스미는 거 같았다. 새로 산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베기스 아코디언 연주를 들으면서 포근하고 달콤한 잠에 들었다. 행복했다.



덧. 무한 사과 오류를 경험한 후 업데이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스마트폰, PC 모두 OS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다. 기계에도 나름은 꽤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주요 모델과 부품, 제조사와 유통사, 기능 등에 관심을 갖고, 관련 기사나 블로그 글을 읽고, 유튜브 영상도 보면서 지식을 쌓고 있다. 혼자서 이런저런 숨겨지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기능 테스트도 해본다.


파일명: 2019.09.03 스위스 베기스 아코디언 연주2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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