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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14. 2020

묵혀있던 그 책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연남동 여행책방 ‘사이에’

버스정류장에 다다르자 타려고 했던 761번 버스가 바로 도착을 했다. 마음속으로 ‘럭키!’를 외치며 버스에 올라탔다. 평일 낮 시간의 버스 안은 한산 했다. 코로나 상황이고 여름방학일 텐데 무슨 일로 등교를 했다가 하교하는 길인지 가장 뒷좌석에 앉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은평구 불광천을 따라서, 서대문구 북가좌동의 DMC(Digital Media City, 디지털 미디어 시티)를 지나서, 연희104고지앞.구성산회관 정류장에서 내렸다.


연희104고지는 서대문구 연희제1∙2동에 있는 산이다. 한국전쟁 때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 탈환을 위해 한강도하작전 후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수색에서 서울의 도심으로 들어서려면 안산을 비롯해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갈래의 능선들을 넘어야 했다. 연합군은 수색에서 불광천을 건너 백련산과 경의선 사이의 넓게 들판이 펼쳐진 남∙북가좌동 일대를 지나 최초의 나지막한 능선과 마주쳤다. 철로 변에서 멎는 그 끝 봉우리가 염산이라는 104고지이다. 연희104고지는 연희고지, 104고지, 연희산, 염산이라고도 부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오른쪽으로 5미터 정도 걸어가니 ‘연남지하 보도’라고 적힌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여기서부터 연남동 올레길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곳은 서대문구 연희동이었는데 지하보도를 통과하면 행정구역상 마포구 연남동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괜스레 해리포터처럼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들어가는 관문인 킹스크로스의 9와 3/4 플랫폼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책방이 있는 건물의 2층 외관에 ‘사이에’라고 서점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간판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있었던 건물의 디자인 요소로 생각이 들 정도로 조화로웠다. ‘Travel Bookshop&Coffee’라고 쓰인 벽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 마침내 여행책방 사이에 에 도착을 했다. 책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상상한 정도의 아담한 규모였다. 계산대에 주인께서 계시지 않길래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 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천천히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창가에 진열된 이지앤북스의 감각적이고 트렌디한 여행서 <Tripful(트립풀)> 시리즈였다. 7년 즈음 전에 가봤지만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후쿠오카’, 언젠가는 꼭 가 보고 싶은 동양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오키나와’를 빠르게 샤샤샥 들춰본 후 제자리에 놓았다.


여행책들은 아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유럽 등 지역별로 나뉘어 있었다. 국내외 에세이, 소설 등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무거운 책보다는 메시지는 진중하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많아 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지에서 머리를 식힐 겸 읽기에 좋은 책들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서점은 죽지 않는다(이시바시 다케후미 지음, 백원근 옮김, 시대의창, 2017.09)>, <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제인 마운트 지음, 진영인 옮김, 아트북스, 2019.08, 원제: Bibliophile, 2018)>처럼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국내외를 막론한 ‘서점’과 ‘책’을 주제로 한 도서들이 별도로 큐레이션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여행과 더불어 책, 서점에 관한 주인장의 애정이 느껴졌다. 사고 싶은 수많은 책들 중에 고민을 하다가 남해의봄날에서 2017년 5월 출간한 양미석 저자의 <도쿄를 만나는 가장 멋진 방법: 책방 탐사>를 구매했다. 10년 이상 서른 번 넘게 일본의 책방을 찾으며 글과 사진으로 남긴 기록의 일부였다. 책에서는 도쿄의 특색 있는 서점 서른 곳 가량을 소개하고 있었다.




새하얀 표지에 예쁜 문양이 새겨진 양장 재질의 <첫, 리스본 MY FIRST LISBON>이라는 책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의 패턴은 포르투갈의 상징 중 하나인 아줄레주(도자기 타일)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었다. 모처럼만에 만난 디자인 철학이 돋보이는 안그라픽스 출판사의 책 답다 싶었다. 독일 작가 알렉산드라 클로보우크는 책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알렉산드라, 일러스트레이터예요.
정확히 말하면 문화와 역사를 그리는 삽화가라고 해두죠.
저는 베를린에서 공부했고 3년 전 대학졸업장을 땄습니다.
그 말은 곧 공인받은 예술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프리랜서에 밑천도 프리.
하지만 제 앞에는 세상이 활짝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베를린 바이센제 미술대학교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대학졸업장은 일종의 증명서에 불과한 한국의 현실에 익숙한 나머지 ‘공인받은 예술가’라는 말이 참 생경하면서도 부러웠다. 사회초년생이 밑천이 없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거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 관문을 뚫으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전부터 경쟁에서 밀린다는 건 곧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 한번 밀리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속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감, 초조함에 먼저 휩싸이는 듯하다. 성실하게 바라던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마침내 사회인이 되었을 때 ‘가진 건 없지만 내 앞에는 세상이 활짝 펼쳐져 있다.’라는 말에서 젊은이의 특권인 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우리나라는 당연한 특권조차 사치가 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재수, 삼수를 하면서까지 공무원, 공기업과 대기업 입사에 목을 매고 있다. 몇 년씩 실무와는 동떨어진 오로지 취업 관문을 뚫기 위해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한다. 취업준비생의 기간이 길어지면 편의점 등 단기 아르바이트를 병행을 한다. 소위 좋은 기업에 속하지 못한 중소기업인의 대부분은 낮은 급여와 불합리한 근무 처우를 감내한다. 원하는 취업 관문을 통과했든 아니든 간에 희한하게도 ‘나는 행복해. 삶에 만족하고 있어.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기대가 돼.’라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소확행으로 고달픈 삶을 달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나도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같은데도 늘 근원을 알 수 없는 다소간의 불안감을 지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작가 알렉산드라 씨가 부러웠다.




몇 해 전 지인이 쓴 여행에세이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서양수, 홍익출판사, 2018.06)>를 읽은 뒤, 그 해 가을에 혼자서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다. 비행시간을 포함해 10박 12일 정도의 일정으로 리스본, 신트라, 포르투 일대를 둘러봤다. 모든 여행지가 좋았지만 특히, 리스본은 머무를 때보다 다녀온 뒤에 여운이 더 길었다. 아직 가로등 불빛이 꺼지기 전 어둑어둑한 새벽녘에 아무도 없는 거리를 지나가던 숙소 앞 트램 소리,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언덕 위 빨간 지붕들 너머 광활하게 펼쳐진 반짝반짝 빛나는 짙푸른 대서양, 이것을 과연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적당히 달짝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크림 맛이 일품이었던 벨렝 지구 파스테이스 드 벨렘의 에그타르트까지…… 추억으로만 남기기에는 너무 아쉬워서 할 수만 있다면 훔쳐서 갖고 오고 싶다는 도둑 심보가 들 정도로 강렬한 기억이었다. <첫, 리스본>의 작가는 책에서


때마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불리는 리스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래서 나도 리스본의 마력에 사로잡혀 팬이 되었나 보다. 다른 여행지에 관한 글이나 책에는 생각만큼 손이 잘 가질 않는데, 유독 포르투갈에 관한 콘텐츠에는 집착을 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여행서점 사이에 에서 발견한 <첫, 리스본>은 김춘수 시인의 시의 한 구절처럼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판권에는 2018년 7월 5일 초판 발행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세상에 나온 지 2년 만에 짝꿍을 찾은 거다. 인연인 책을 발견해서 짝꿍을 맺는 것도 동네서점에 들렀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다. 내가 집어 든 책이 마지막이어서 평대 한 곳이 휑해졌다. 좋은 비움이었다.




계산대에는 ‘종을 쳐서 불러주세요. 주인장은 옆에서 다른 작업 중입니다. 졸고 있다면 흔들어서 깨워주세요.’라는 내용의 메모가 붙어있었다. 주인께서는 자리를 비운 채 외출을 한 게 아니고, 계산대와 연결된 방에서 일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머물러 보고 싶은 여행지인 중국 청두에 관한 김송은 저자의 에세이 <좋은 시절을 만나러 청두에 갑니다(컴인, 2019.03)>까지 총 3권을 결제를 했다. 중국 쓰촨성에 위치한 청두는 대나무 숲에서 사는 판다의 고향이자 <삼국지>의 유비와 제갈량이 활약했고, 시인 두보가 자연을 노래한 예술∙문화와 미식의 도시이다.


계산을 마친 후 사장님께 내내 궁금했던 것을 여쭤봤다.  ‘옆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나요? 유명인이라도 오는 모양이에요.’ 사이에 에 오는 길에 건너편에 언뜻 공연장처럼 생긴 깔끔한 건물 앞에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야외 공연을 구경할 때 앉으면 안성맞춤인 크고 넓은 네 개 단으로 이뤄진 층계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문전성시였다. 벽에는 전시회나 사진전의 홍보물처럼 보이는 동일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쭉 늘어서 붙어있었다. 문구는 AUFGLET GRAND OPENING. 공연장도, 미술관도 아니었다. 와플 가게였다. 더 구체적으로는 크로플 카페였다. 사장님께서는 가게가 인기가 엄청 좋아서 올해 장마가 길어 비가 자주 내리는데도 늘 대기 인원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내가 본 인파는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맛있는 크로플을 맛을 보고자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크로플은 크루아상을 와플처럼 구운 빵이었다. 바삭하면서도 촉촉한 크루아상과 두툼하고 부드러운 와플의 식감을 모두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아우프글렛은 금호동에서 대성공을 거둔 후 최근 연남동에 상륙한 모양이었다.


시간 여유가 되면 기다리다 맛 한번 보고 가라는 사장님의 농담에 손사래를 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트렌드세터가 되려면 종종 연트럴파크 정도는 거닐어줘야 하는 건가. 모처럼만에 본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여유롭고 평온하고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먹을 수 있는 인기 크로플은 됐고, 기회가 된다면 사이에 에서 진행하는 ‘도시 탐독’ 소모임에도 참여해보고 싶어 졌다. 여행 작가님을 초청해 그곳의 간식을 맛을 보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는 설렘만 가득하니까.



한 권 남은 <첫, 리스본>을 집어들어서 평대가 휑 해졌다.


<첫, 리스본>. 표지의 아줄레주 문양이 인상적이다.


여행책방 '사이에' 내부 모습


출입구 옆에 방문자의 여행 이야기를 적은 메모지가 붙어 있다.


연남지하 보도 안내 표지판.



여행책방 '사이에'


공식 웹사이트: https://saie.co.kr/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aiebook/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aiebook



자료 출처


연희104고지 에 관한 설명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지명사전: 104고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07297&cid=43722&categoryId=43722


네이버 지식백과 > 서울지명사전: 연희고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408094&cid=43722&categoryId=43722


위키피디아: 연희고지 전투

https://ko.wikipedia.org/wiki/%EC%97%B0%ED%9D%AC%EA%B3%A0%EC%A7%80_%EC%A0%84%ED%88%AC



책 정보


알렉산드라 클로보우크 지음, 김진아 옮김, <첫, 리스본 MY FIRST LISBON>, 안그라픽스, 2018.07


김송은, <좋은 시절을 만나러 청두에 갑니다>, 컴인, 2019.03


양미석 저자, <도쿄를 만나는 가장 멋진 방법: 책방 탐사>, 남해의봄날, 2017.05


<Tripful 트립풀> 시리즈, 이지앤북스


서양수, <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 홍익출판사,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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