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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Oct 03. 2020

효자 남편에게 건네고 싶은 말

'가족이니까'라는 짐을 내려놓고 부디 '자유'로워 지길

‘내가 이러려고 결혼한 줄 아느냐. 결혼하면 더 행복할 줄 알았는데 나는 지금 너무 불행하다.’


결혼 후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미리 알고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며 그에게 들은 최악의 말은 언젠가 시아버지를 모시고 같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다른 요구 사항들도 황당했지만 내가 거절하면 서로 빈정이 좀 상하고 말 문제였다. 솔직하게 시아버지 동거 사안은 듣자마자 ‘아, 큰일 났다. 나 이 결혼 잘못했구나.’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악이라는 표현이 야박한가. 결혼도 했는데 시가를 무시하고 가족의 의미를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드는가. 나는 친부모님과도 다시 함께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60대이신 부모님께서는 노년기에 접어드셨다. 노안 때문에 평생 안 쓰셨던 안경을 쓰시거나 예전보다 병원 방문이 잦으신 모습을 뵐 때면 ‘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구나.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셨구나.’라는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동시에 비약적인 의학기술 발달로 기대 수명 100세 시대 아닌가. 우스개로 하는 말이더라도 '시대가 변해서 60대 초반도 청년 소리를 듣는 세상이지.’ 싶어서 안도하기도 한다. 인생사는 알 수 없고 나중 일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부모님과 따로 살면서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간다고 생각을 했다. 부모님께서도 결혼한 자식과 따로 살면서 각자 가정을 운영하는 게 마땅하며, 나중엔 요양시설에서 생활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모든 인간은 생로병사 굴레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기심으로 우리 부모님만은 예외였으면 싶다.


시아버지께서도 결혼 전 ‘자신 하나 먹고사는 문제는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했다. 그 말씀을 철썩 같이 믿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아버지와 자신은 성격이 잘 맞지 않고 편한 관계는 아니라고 말을 했다. 다른 가족들과도 살갑게 지내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그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할 때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 나쁜 관계도, 좋은 관계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불편한 사람과는 관계의 접점을 최대한 줄이고 싶다. 인지상정이다. 가족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력을 갖춘 어른으로서 좋은 점은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늘 가능하지는 않지만 손해를 감수하면 최소한 선택의 여지는 있다. 초중고등학생 때 학급에 미치도록 관계가 나쁜 급우가 있더라도 반을 옮길 수 없었다. 최후의 수단인 전학이나 퇴학은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회사에서 싫은 사람을 매일 마주치는 일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일로 엮인 관계이니 다행히 관련된 일을 마치면 싫은 관계도 자연스레 종료된다. 부서 변경을 신청하는 방법도 있다. 최악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면 그만이다. 견디기 힘들고 억울한 심정은 10대 때와 마찬가지다. 그래도 최소한 학창 시절보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 선택지는 더 폭넓어 졌다.


부모의 보호 아래 있던 미성년에서 경제적, 심리적으로 자립을 한 성인이 된 후 내 인간관계 철학은 가족에게도 적용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 낼 시간이 필요했다. 꽤 오랜 시간 부모님과 소원한 관계로 지냈다. 우리 가족은 자신과 서로를 위해서 심리상담, 상담치료, 글쓰기 등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용서를 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 시아버지와 같이 살아야 할 수도 있다.’라는 배우자의 생각은 이해 불가였다. 이제 막 결혼을 해서 새로운 생활을 꾸려가는 찰나였다. 제 코가 석자인데 자신과도 불편한 관계인 사람과 언젠가 동거를 해야 할 걱정을 하고 있다니. 무엇보다 내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그의 말과 행동과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내 입장에선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었다. 그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일찌감치 독립해서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 나처럼 부모로부터 감정적 자립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감춰져 있던 넘치는 가족애를 유감없이 발산하는 배우자가 낯설었다. 내게는 원칙과 결단이 필요한 심각한 일들을 그는 ‘가족이니까’라는 말 한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려고 했다. 결혼 전 ‘남자친구’와 결혼 후 ‘남편’의 말과 행동은 글자 수와 단어 차이만큼 판이하게 달랐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남자는 결혼을 하면 다 효자가 된다던데 내게도 그런 일이 닥친 것일까?




우연한 기회에 우리는 각기 다른 가족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에게 나는 그의 전체 가족 구성원 중 일부였다. 반면 나에게 남편은 결혼 후 새롭게 일군 내 가족 구성원의 전부였다. 이 차이 때문에 우리는 결혼 초 서로에게 변하라고 요구했다. 끊임없는 평행선을 걷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그의 부모에게 자주 연락을 하길 바랐다. 명절에 원래 하던 외식 대신 그의 가족을 우리집에 초대해 대접하고 싶어 했다. 당시에 그에게 이 사안들은 배우자인 나와 논의를 하거나 내 동의가 필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의 가족이자 배우자인 내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한 일로 치부했다. 결혼 후에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다던 그의 가족을 나와 내 생각보다 우선시하는 말과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서운하고 답답했다. 생각을 할수록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벌어질 우리 결혼의 종지부가 그려졌다. 내 속이 좁음에 한스럽고 괴로웠다. 억울한 심경에 효자인 그를 원망하다 자책하길 반복했다.




어느 날 그는 새로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가족 관계 항목에 위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마지막에 배우자인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당연히 법적 혼인 관계이자 현재 동거 중인 내 이름을 가장 먼저 기입했을 줄 알았다.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은 그렇다 치자. 최소한 배우자가 형제, 자매보다는 먼저 아닌가.


문득 이해가지 않았던 언젠가 그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남편에게 결혼 생활이 어떠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결혼 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그의 대답에 의아했다. 나는 결혼 후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연애 중이었다면 극심한 명절 갈등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설날, 추석, 어버이날, 부모님 생신 등 가족 만남 횟수는 두 배로 늘었다. 법적 혼인 관계이며 가족관계 증명서 등 각종 문서에 서로의 이름이 기재돼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이나 계획에 배우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 무엇보다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 같이 자고 함께 먹고 매일 얼굴을 마주한 채 대화를 나눈다. 결혼 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력서를 보는 순간 결혼 후 달라진 게 없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편에게 배우자란 원래 그의 가족에 새롭게 합류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가족 개념에서 나와 처가 식구들은 그의 원래 가족을 기준으로 ‘추가’가 된 존재였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전체 가족 구성원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왜 자기 식구와 처가 식구가 다르지 않다고 했는지, 결혼 전후가 비슷하다고 했는지, 왜 ‘나중에 부모님과 동거해야 할 수도 있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는지, 명절에 가족들이 우리집을 얼마든지 방문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는지, 싫다고 하는데도 왜 정기적인 양가 부모님 연락을 의무라면서 강요를 했는지, 직장 상사를 대한다고 생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억지로 친밀감을 빠르게 높여야 한다고 여겼는지 이해되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한 가족’이니 모든 가족에게 잘하고 가족 누구라도 힘들면 나서서 돕는 게 당연했다. 새로 추가된 가족에게도 원가족에게 하던 태도로 대하고자 했다. 배우자인 나에게는 옳은 자신의 방식에 합류해서 따르길 바랐다.




남편은 그의 부모가 나를 좋지 않게 보는 게 싫다고 말했다. 해결책으로 스스로가 부모를 설득하기보다 갈등 상황에서 내가 그의 부모의 기대에 맞추기를 바랐다. 이것은 그와 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같은 상황에서 나는 우리 부모님이 사위를 이해하기를 바랐다. 남편에게 결혼 후 새로 맺게 된 처가 가족과의 관계는 낯설기 마련이다. 이미 서로 익숙한 가족들이 새로운 가족에 맞추는 배려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남편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남이었던 배우자보다 핏줄인 부모를 설득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말로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부모-자식 간에 못할 말이 무엇이랴 싶었다.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점차 그와 그의 가족 간 관계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나와 달리 그는 부모님과 관계가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과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지도 않고 살가울 만큼 친밀감이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긴밀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알고 있어야 하는 중요하고 필요한 말은 짧고 굵게 거침없이 나누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은 나만큼 부모님과 솔직한 대화를 주고받는 관계는 아닌 듯했다. 불편하거나 잘 보이고 싶은 관계라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의 부모와 내 입장이 달랐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과 더 편한 관계인 내가 바뀌기를 바랐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내가 아닌 그의 부모 편을 들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반면, 나에게 배우자는 내 가족 구성원의 전부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했다. 회사 근처 원룸에서 혼자 살면서 거주지를 독립했고 스스로 생활력을 갖춰 나갔다. 나에게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의 탄생이자 원가족(부모)과 완전한 분리를 의미했다. 이제 나에게는 나와 남편으로 구성된 새로운 ‘우리 가족’이 존재했다. 시가 식구, 친정 식구는 엄밀하게는 다른 개별 가족이었다. 나에게는 내 의지로 꾸린 우리 가족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행복하게 지내도록 보장을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만일 친정 식구가 우리집을 방문할 경우 당연히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우리집은 그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나는 그의 가족이자 배우자로서 이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배우자와 사이좋게 지내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우선은 내가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그의 부모에게 연락을 하는 게 나를 불행하게 한다면 그에게 점차 불만이 쌓여서 우리 관계는 악화될 것이다. 나에게 우선순위는 명확하다. 나 > 배우자 > 우리 부모와 가족 > 그의 부모와 가족 순서다. 안타깝게도 그의 우선순위는 그의 부모와 가족, 우리 부모와 가족 > 그 > 아내 순서인 것 같지만. 상관없다. 내 감정이 좋아야 우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시가나 친정에서도 우리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하고 돈독하게 잘 지내기를 바랄 것이다. 적어도 자신들이 갈등 원인으로 작용해 자식 부부가 다투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정기적인 연락을 드리고 좋은 선물을 보내기보다 서로 간에 불화 없이 근심을 안겨드리지 않는 편이 더 나은 효도 이리라.




알고 보니 효자였던 남편은 성평등을 지향하며 공평한 가사분담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드문드문 특히 부모와 관련된 일에 유독 보수적으로 협의 없이 ‘자식이고 가족이니까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나는 배우자의 가족관을 ‘축소된(?), 변형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그는 스스로 맏아들로서 가족을 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기성세대 가부장제 영향 때문일 것이다. 이혼 후 혼자 지내시는 아버지 부양 부담도 느끼고 있었다.


효자 남편이 괴로운 이유는 그가 부모에게 자신과 배우자의 생각을 명확하게 피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오’, ‘그건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망설이다가 결국 하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배우자에게 ‘이번만 참자’라고 문제 본질에 접근해 해결하기를 회피한다. 사소한 예로 시가 식구들과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근처 역에서 기다리면 시아버지께서 우리를 차에 태워서 음식점까지 가기로 했다. 알고 보니 역에서 음식점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남편에게 시아버지께 번거롭게 역에 들르시지 말고 바로 음식점에서 뵙자고 연락을 드리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정해진 대로 시아버지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운전자에게도 더 나은 제안인데 연락 한 통이 그렇게 어려운가? 싶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거나 사소한 일로 연락을 해 말을 섞고 싶지 않았거나 두 가지가 섞인 복합적인 감정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결혼 가정에서 매번 비슷한 이유로 다투는 명절, 시어머니가 좋은 마음으로 챙겨 주시는 음식, 일방적인 연락 강요에서 비롯되는 갈등 상황도 인과관계는 다 같다. 만일 부모님 부양 문제, 금전적인 사안에도 배우자가 효자 행세를 한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효심이 깊다기보다는 성격 문제다. 결혼 초에는 남편이 나보다 그의 부모를 더 신경을 쓴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부모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길 꺼리는 성격은 그의 성장배경 영향일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20대 시절 부모와 관계에서 껄끄러운 감정이 생겨난 것 같다. 어떤 이유로든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마음의 빚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배우자가 건넨 드문드문 스민 이야기에서 그의 어린 시절을 짐작해 현재 드러난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할 뿐이다.


다만, 그가 부모와 감정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진작 정리했어야 하는 일들을 끌어안고 있는 한 그의 결혼 생활은 늘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길 바란다. 나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자신 가족 문제를 감당할 수 있는 한 스스로 감당하고 해결하겠다는 말만큼 공허한 외침도 없다. 그가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은 배우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며 우리 결혼 생활에 무조건 영향을 미친다. 이제 가족과 관련된 어떤 사안이든 가장 먼저 의논을 해야 할 상대는 그의 부모가 아닌 배우자라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가족이니까’라는 미명뿐인 짐을 내려놓길 바란다.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지키는 성을 쌓아 부디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가족, 부모-자식 간이라도 필요한 순간에는 확실한 선을 그어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매정한 일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는 삶이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변하면 선은 얼마든지 조정하고 성은 부쉈다가 다시 지으면 된다. 배우자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세상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늘 이해하려 노력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벗으로서 건네고 싶은 말이다.




이 글을 포함한 2020년 브런치에 연재한 결혼 관련 글 중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글을 모아서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크몽 전자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크몽 전자책에는 지난 2년 동안 달라지고 깊어진 생각을 덧붙여 결혼에 대한 좀 더 예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글을 기반으로 발전시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혼/부부/가족 나아가 이혼과 비혼에 관한 생각을 크몽 전자책으로 만나보세요!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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