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며느라기 증후군을 겪을까?
혜리: 저…… 그런데 밥 먹고 나서 설거지는 제가 해야겠죠?
혜리: 과일은 제가 예쁘게 깎을 자신이 없어서 유튜브 좀 찾아봤는데 이렇게 깎는 게 나아요? 아니면 이렇게?친구: 야, 김혜리 너 가사도우미 면접 보러 가니?
상사(여성): 혜리 씨, 그런 걱정하지 말고 그냥 맛있게 먹고, 남자 친구 부모님은 어떤 분인지 편하게 보고 오면 돼.
혜리: 친구 집에 가도 밥 먹고 설거지할 수 있잖아. 과일도 깎고.
친구: 웃기지 마. 너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설거지 한 적 있어?
수신지, <며느라기> 중에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시어머니 댁에 갈 때면 어머니 형제이신 이모님, 외삼촌, 나에게는 시가 외사촌과 조카 관계인 그분들의 가족들도 같이 모이곤 했다. 북적북적 대가족이었다. 어머니는 자매가 많으셨다. 친정처럼 시끌벅적했고 친정보다 편안하고 평등한 분위기였다. 그들 중 누구도 처음 맞이하는 며느리가 과일을 깎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다. 내가 할 일은 맛있게 먹고 다 같이 음식 차리고 치울 때 돕는 것이었다. 여러 가족 중 원하는 무리에 껴서 자유롭게 어울려 대화하고 즐겁게 놀면 충분했다. 시어머니와 이모님 그룹, 재치 넘치는 외삼촌과 사촌 그룹 등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시어머니, 아버님(시어머니 배우자), 이모님, 이모부님, 외삼촌, 외숙모 등 모든 가족이 나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낯설어서 멀뚱히 서 있으면 누군가 금세 눈치를 채셨다. 남편을 꾸짖으며 얼른 아내를 챙기라고 말씀을 하셨다. 불편했던 마음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자동적으로 몸이 부엌에 가 있으면 얼른 거실로 불러내셨다. 할 일도 없이 거기 있지 말고 여기서 음식을 먹으며 같이 놀자고 말씀해 주셨다.
사촌 언니(남편의 사촌 누나)께서는 내게 존댓말을 사용해 주셔서 더욱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친정에서 우리보다 항렬이 위인 고모들께서도 남편인 조카사위에게 여전히 존댓말로 높여주고 계셨다. 결혼한 지 20년이 넘은 사촌 언니 남편인 사촌 형부(고모 입장: 조카사위)에게도 마찬가지셨다. 만일 남동생이 결혼에서 조카며느리가 생긴다면 고모들은 어떻게 대하실까? 아마도 조카사위와는 달리 말씀을 편하게 하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가족 전체적으로 여성 기혼자보다 남성 기혼자에게 높임말을 쓰는 경향이 짙은 듯하다. 예로부터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어렵고 잘 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배우자 가족에게 여전히 남성 기혼자보다 여성 기혼자가 높임말을 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예를 들면, 남편은 내 동생들에게 편하게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내 남동생과 나이가 비슷한 그의 사촌동생들에게 높임말을 사용하고 있다.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다. 이상하게 내게는 존댓말이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시어머니 댁에 갈 때면 배우자 가족에게 존중과 대우를 받는 기분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나에게는 낯선 남편의 외갓집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한 엄마의 시가 식구들(나의 친가) 보다 편안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우리나라 시부모-며느리 관계는 여전히 강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부장제와 유교문화 영향 때문이다. 나는 이런 잔재가 오늘날 시대에 맞지 않으며 불합리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을 선택할 때 권위적이지 않고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며 체면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배우자의 가족 분위기는 중요한 요소였다. 솔직하게 예비 배우자의 여러 사회적 조건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애인의 많은 좋은 점들을 알고 있어서 학벌, 직업, 연봉 등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예비 시가)와 나(며느리)의 관계 형성에는 분명 영향을 미치리라고 직감했다. 최소한 부모 입장에서 시부모님은 며느리를 만만하거나 소유물처럼 여길 수는 없었다. 혼자 살 줄 알았던 아들 인생에 결혼을 안겨준 고마운 존재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양쪽의 조건이 동등할 때 한쪽은 여전히 기울어진 상태에 머물러있는 법이다. 구조 자체가 불평등하게 짜여 있는 상태에서는 한쪽이 몸집이 더 클 때 비로소 균형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나를 영악하거나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결혼 후 젊은 부부도 여전히 남성 가족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윗세대가 미치는 인식과 관습 영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감정과 좋은 사람이라는 점은 결혼 기본 전제로 하자. 배우자가 비슷한 사회적 조건이었다면 억울하지만 난 여전히 기울어진 비탈면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것이다. 평평한 운동장을 세우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갈등과 충돌을 감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에 가정은 없지만 예외적으로 천사 같은 시가를 만나 지금보다 더 윤택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고. 오해는 하지 마시길. 양가 집안 격차는 크지 않고 도토리 키재기 마냥 비슷비슷하다. 사랑에는 장벽이 없다. 하지만 결혼은 비슷한 사람, 집안 간에 해야 한다는 말을 결혼 전부터 전적으로 신뢰했다. 많은 중요한 요소들 중 특히 양가의 경제적 수준과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3년 간 나름 투쟁으로 쟁취한 완만해진 운동장과 누구에게도 예속받지 않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내 삶에 만족한다. 아마 시가, 친정, 남편조차도 내가 투쟁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분명히 결혼 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내 삶을 지켜낼 울타리가 생겼다. 가족 누구라도 편견 없이 평등하고 편안하게 대할 굳은 심지가 생겨났다. 이제는 주저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시가에도 필요할 때 주관을 분명하게 밝힐 용기와 힘이 생겼다. 관습적으로 통용된 불합리한 상황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당연한 일을 마땅하게 만들기 위해 설득하고 저항한 결과다. 어쩌면 시가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때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도 유난히 별스러운 며느리가 들어왔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만일 사실이라면 내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해주지 않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시가, 친정, 지인, 사회 등 외부에서 강요하는 차별적 관습과 인식을 따를지 말지는 두 번째 문제이다. 며느라기 시절 첫 번째 해결 과제는 마음속 내적 갈등과 혼란을 정리하고 나름의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많은 어른들은 늘 현명하게 그러했 듯이 변화한 세상과 가치관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다른 세대에게 강요하고 일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면 안 된다고 자각했다. 나 같은 경우 오히려 지레짐작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필요 이상으로 시가 어른을 어렵고 불편해했다. 만화 <며느리기> 혜리처럼 스스로 잘못 만든 기성세대 틀에 갇혀서 긴장하고 과민했다.
‘설거지하지 마. 어차피 시집가면 지겹게 하게 돼 있어.’
‘예쁜 송편 빚으면 예쁜 딸 낳는다더라.’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남자들은 그런 거 몰라. 여자가 여우 같이 행동해서 잘 길들여야 해.’
‘어머, 이제 우리 00 시집갈 때 다 됐네. 만두도 다 빚고.’
‘어머님,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 ‘그러니? 어디 한번 우리 새아가가 만든 음식 맛 좀 볼까.’
(남편과 두 아들을 두고) ‘아시죠? 저는 아들 셋을 키운다니까요.’
(심지어) ‘결혼해도 일을 계속할 거니?’
어릴 때부터 가정, 사회 등 주변에서 듣고 자란 말이다. 요리와 설거지는 잘해야 하고 여성에게 가사 노동은 의무이며 철부지 남편은 잘 챙기고 길들여야 할 존재다. 무의식에 세뇌된 가치관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혼란스러운 며느라기 증후군을 겪는다. 인간 000는 자유롭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상하게 며느리 000는 스스로를 가치보다 낮추고 자꾸 뭔가를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No’라는 단어를 외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사라진 인어공주 에리얼이 된 것 같았다. 아무도 지운 적이 없는데 내 세상에서 ‘No’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원래의 나와 새로 부여된 역할인 며느리, 아내 모습 사이에서 자아 정체성의 혼란과 내적 갈등, 충돌을 겪었다.
‘여자애가 왜 그렇게 무뚝뚝하고 애교가 없니?’ 내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직계 가족이 건넨 유일한 성차별적 발언이었다. 위의 나머지 발언은 주로 친척을 만났을 때 1년에 몇 번 들었던 말들이다. ‘살아온 세대가 달라서 하신 말씀이겠지.’하고 흘려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애교가 없고 사근사근하지 않은 성격은 내게 고민이자 취약점이었다. 가까운 어른들이 지적한 성격적 결함과 문제점을 감추고 싶었다. 강요받은 애교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때때로 자책했다.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이 내 성격 때문에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친절하고 살갑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똑같이 무뚝뚝한 남동생에게 어른들은 ‘쟤는 대체 왜 그러니? 남자애라 그렇지 뭐.’라고 원래 그런 거라고 인정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이 꼭 애교가 있어야 하나? 대체 애교가 뭐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교는 부족하고 상냥하지는 않지만 까칠하진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비교적 친절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살가운 성격인 편이었다. 애교가 친절 등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는 더 이상 애교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살가운 정도를 기준으로 하면 애교는 친절보다 윗단계인 것 같다. 타고난 애교 많은 사랑스러운 성격을 지닌 경우는 예외로 하자. 보통은 부탁해야 할 일이 있거나 얻어낼 것이 있을 때 애교를 부리게 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아쉬운 상황이나 입장에 처했을 때 감춰져 있던 애교 기술이 발현된다. 녹록지 않은 회사 생활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 보고자 얼마나 많은 애교 필살기를 부렸던지…… 비교적 평등한 가족관계였기에 없는 애교를 굳이 꺼내지 않고 무뚝뚝하게 지내도 되었던 건 아닐까. 어른들에게 핀잔과 아쉬운 소리는 좀 들었지만.
며느리기를 떨쳐낸 과정은 내 마음속 애교 압박에서 벗어난 과정과 비슷했다. 우선 누군가에게 잘 보인다거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대신 ‘내가 뭐가 아쉬워서……’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낮추었던 지위를 평등하게 끌어올렸다. 배우자와 동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고 나는 세상 누구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부모님보다 성인 000는 이제 내가 더 잘 알고 심지어 맞춰서 같이 살고 있었다. 나는 쇼핑, 도박, 게임 등 중독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과 행동,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허황된 인생역전 따위 바라지 않고 성실하고 알뜰하게 차곡차곡 살림을 불려 가고자 했다. 이렇게 하던 대로 내 역할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서운한 감정 등은 시부모님께서 해소하실 몫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 자식보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신 그분들의 내공을 의지하기로 했다. 우리 부모님과 다르지 않으시리라 믿었다.
이제야 내가 원했던 대로 생활면에서는 남편과 동거하듯이 연인처럼 살고 있다. 시부모님께 안부 연락을 드리지 않는다. 올해 생신 때 축하 전화를 드렸다. 남편은 웬일이냐는 반응이었다. 1년에 3~4차례 음식 보내주실 때 당연히 남편에게 연락을 하신다. 시부모님 안부가 궁금할 때는 남편에게 건강하신지, 집에 무슨 일은 없으신 지 물어본다. 올해 어버이날은 세 가족(친정, 시가, 시어머니 가족) 모두 찾아뵈었다. 명절은 우여곡절이 있어서 올해 두 차례 모두 시가 식사에 불참했다. 되도록 참석을 할 생각이나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상황이 닥쳤을 때 마음 가는 대로 하려고 한다. 명절 선물은 세 집 모두 택배로 보내 드렸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가족 행사나 모임은 거의 없었다. 결혼 초부터 배우자는 가족 모임에 ‘같이 갈래?’라고 의사를 묻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 내외분을 뵙고 싶은데 두 분 모두 고령이시라 코로나 우려에 만남을 피하고 있다. 시어머니 가족 모임은 즐겁고 편안해서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생각할수록 각자의 가족에게 우리의 지위는 ‘꿀’이었다. 우리가 각각 결혼을 했다면 시댁 어른들과의 자리가 그렇게 편할까? 사위는 대접받지만 며느리는 오히려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우리의 위치는 사위보다 더 편했다. ‘딸내미랑 같이 사는 친구’는 각자의 부모님께 의무는 없이 호의만 받는 자리다. 내가 어머님이 보내주신 열무김치를 맛있게 먹었다 해서 효도 여행을 기획하거나 집안의 가전제품을 바꿔드려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머님께 맛있다고 전해드려!” 정도가 끝이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님을 좋아한다. 오랜만에 뵈면 반갑고 베풀어주시는 호의에 감사한다. 그건 아마도 우리가 친구의 부모님께 뭘 해드릴 의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효도는 셀프니까.
_김하나,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230-231쪽 중에서
그동안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 시가 어른과 나 사이에서 서로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마음에 좀 걸리지 않느냐고? 그럴 땐 이런 상상을 한다. 만일 상냥하고 사근사근하면서 손주도 안겨줄 며느리를 바라는 내색을 하신다면. ‘어머! 그러세요? 저는 그럴 수가 없는데.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며느리를 바꾸세요. 저는 빠져드릴게요. 법적 혼인관계가 증명된 문서가 저를 옥죄는 근거라면 그런 종이 쪼가리 따위 필요 없네요. 행복하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을 던지고 얼마든지 물러날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는 사랑하는 배우자 외에는 결혼에 별로 미련이 없다. 반면, 그분들의 아들에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확신이 아닌 자신감이다.) 그만큼 나는 한 단계, 두 단계 바랐던 결혼생활 모습을 만들어가면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더 이상 누군가가 꿈꾸는 며느리상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한때 심각한 고민이었던 어른들에게 강요받은 애교가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덕분에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사회성은 더 길러졌으려나.
인용 출처
며느라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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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포함한 2020년 브런치에 연재한 결혼 관련 글 중 많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글을 모아서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크몽 전자책으로 출간했습니다. 크몽 전자책에는 지난 2년 동안 달라지고 깊어진 생각을 덧붙여 결혼에 대한 좀 더 예리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글을 기반으로 발전시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결혼/부부/가족 나아가 이혼과 비혼에 관한 생각을 크몽 전자책으로 만나보세요!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 <드디어 며느라기 해방입니다> PDF 전자책 살펴보기: https://kmong.com/gig/39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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