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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소향 Dec 23. 2019

당당한 염세주의자

나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10대 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10대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20대에는 살아내기에 바빴다. '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란 고민이 수시로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결국 30대가 되고 나니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어떻게든 살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30대 중반 넘어서니 '나'란 사람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어차피 인생은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고,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고, 사랑도 일도 내가 원치 않았던,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들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난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어진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 선에서 나를 지켜야만 했고, 또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도전을 피하며 현실에 안주하길 바랐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겪지 않으려 새로운 인연을 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자꾸 기피하게 되었다.

도전과 열정 같은 단어는 이제 더 이상 나를 자극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더 구역질 나게 했다.

그런데 개인주의적 성향이라 믿고 있던 내 모습이 혹시 염세주의적이 되어 버린 건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어릴 적 도덕 시간에 배웠던 염세주의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삶은 고통일 뿐이며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믿는 철학적 사상이라고 기억하고 있기에 내 삶과 생각이 염세주의적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염세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린건 <당당한 염세주의자>란 책의 서평 의뢰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염세주의란 단어는 일단 부정적이다. (나에게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당당한 염세주의자라는 제목을 뽑았다는 것은 염세주의를 통해 무언가 배울 수 있는 삶의 교훈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평 의뢰를 수락했고, 책의 내용 중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은 가감 없이 비판하겠다고 에디터분께 말씀을 드렸고, 책을 보내준 에디터분도 수락하였다.

 

스스로를 염세 철학가라고 소개한 저자는 대만의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인 사람이었다. 저자는 장자의 사상을 통해 염세주의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과 대면한 젊은이들에게 욜로와 염세주의 같은 단어는 현재의 불합리함을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는 단어이자 삶의 태도 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염세는 일시적인 기분상태가 아니라 끝없는 지겨움과 권태, 그리고 무기력함이다. '긍정의 힘'은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불합리한 지점이 있으며 자신에게는 그것을 개선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느낀다면 꿈, 희망, 미래 따위를 아무리 떠들어도 허황된 구호처럼 들리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제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당당한 염세주의자 P7)

그러나 욜로나 염세주의는 이 시대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욜로는 소확행으로 염세주의는 개인주의쯤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염세주의는 현실의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어쩌면 매우 위험한 사상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 우 무기력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삶을 극단적으로 마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늘 필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리만의 생각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며 타인과 소통한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나의 관점'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세상에 대한 나의 기본 신념이 된다.

나 자신을 마땅히 죽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관점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나의 입장에서 벗어나거나 나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 속 이미지에 자신을 가두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을 지키면서도 필요할 때는 이를 깨는 훈련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당당한 염세주의자 P82)

책을 읽으며 저자가 말하는 장자를 통해 바라본 염세주의란 위 구절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린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로또에 당첨되고, 내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며, 내 시간을 온전히 내가 원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그건 자유라기 보단 욕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린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 일지 모른다. 욕망이건 자유건 단어가 가진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욕망이니 욕망을 쫓는 삶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욕망을 다 충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욕망을 충족시키려 살아가다가도 소위 말하는 금수저들이 무척이나 쉽게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을 바라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탈감과 염세주의를 느끼게 된다. 어쩌면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관점을 지키면서 또 역설적이게 자신의 관점을 버려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철저히 욕망과 자유를 구분했지만, 읽는 독자인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욕망이건 자유건 우리가 추구하는 건 대부분 다 비슷하다.

안정된 삶, 돈이 있는 삶, 내 시간이 있는 삶, 내 삶에서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그런 삶을 우리는 모두 꿈꾼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난 자신의 관점을 지키며 또 때론 자신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자신의 관점을 지킨다는 건,

우리가 부정적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게 도와준다.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거나, 살아가야 할 이유, 힘들더라도 내가 이 삶을 지탱해야 하는 이유, 자신이 하는 일이 힘들더라도 해야겠다는 생각과 의지 모두 자신만의 삶의 관점에서 나온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그런 관점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의 삶의 경험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자기 관점이 더욱더 뚜렷해진다. 변화가 두렵고, 내가 했던 방식이 무조건 정답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관점은 무시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삶의 태도인 것이다.



책을 덮으며 저자의 생각과 장자의 염세주의적 관점을 모두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다만 장자가 가진 삶의 태도는 분명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방식이자 생각임에는 동의했다.

아쉬운 건, 염세주의란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의미가 더 크기에 삶을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염세주의적 관점에서도 삶은 분명 배울만한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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