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와 늑골 골절로 병원에서 엄마와 지낼 때는 병원문만 나서면 괜찮아지실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흘러 예상보다 일주일이 미뤄지긴 했지만 퇴원하시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으며 최선을 다했다.
처음 엄마가 다치셨을 때.
오진으로 인한 통원치료가 2주간 진행되었고, 상황의 심각성을 뒤늦게 확인한 의사는 갑작스러운 입원을 요구했다. 2개월 같았던 2주간의 입원기간이 끝난 후 엄마는 엄마의 집으로 퇴원하셨다. 드디어 지옥 같았던 병원 생활에서 해방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 늑골 보호대와 어깨 보호를 위한 팔걸이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식사를 하실 때도 화장실에 가실 때도 보호자가 필요했다. 엄마의 곁에 누군가가 있어야만 했다.
동생이 함께 거주하고 있지만 동생에게 일이 있던 시기라 나는 거의 매일 엄마댁으로 출근을 했다. 내게도 일이 있었지만 엄마댁에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기 어려웠기에 내가 없는 사이 힘들 동생을 생각하며 엄마를 돌보거나 집안일을 했다. 가령 창문을 말갛게 닦는다던지, 잡풀을 뽑고 화단에 물을 준다던지, 제일 싫어하는 설거지를 한다던지, 최고난도인 엄마를 목욕시켜 드린다던지 등등의 일이다.
엄마의 마당에 남겨놓은 것들.
동생이 돌아오면 서둘러 퇴근이다.
나에겐 중학교 2학년 아이와 끝도 없는 집안일에 곧 시작될 강의로 할 일은 쌓여있었고 서점 일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엄마댁에서 퇴근(?) 후 처리하게 되니 쉼이 없을 수밖에. 다만 밤 잠을 잔다는 것이 미안하여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주 보호자 역할을 하는 동생의 힘듦을 짐작하기에 무거운 마음은 더하기만 될 뿐 빼기 하나 없이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퇴원하신 지 두 달이 다 되었을 무렵. 다치시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진 어깨와 늑골은 많이 좋아지셨지만 입원기간인 겨우 2주 동안 안겨준 근손실은 채워지지 않았고 부축하지 않으면 화장실조차 이용하시지 못했다. 그즈음 동생은 힘든 내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아무래도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와야겠다는 혼자만의 결심을 했다.
"우리 캠핑 가자."
무거운 마음을 숨긴 채 보조석에 앉아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빛이 그려놓은 수많은 선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참았다. 집에서 가져간 것들로 대충 늦은 저녁을 먹고 좁은 텐트 안으로 들어가 입을 떼었다.
"아무래도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와야 할 거 같아."
많은 생각 끝에 남편과 아이에게 나의 생각을 전했고 그들은 나의 생각을 차분하게 받아주었다.
"엄마를 모셔오면 힘들 거야. 내가 막 짜증을 낼 수 있고 나로 인해 많이 힘들어질 수 있을 거야."
듣고 있던 아이와 남편은 이견없이 괜찮다고 했다.
......
다음 날. 동생에게 알렸고 'ㅇㅇ'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제 엄마가 계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복층집인 우리 집은 하나뿐인 욕실 겸 화장실과 방 3개(매우 큰 안방 하나와 아주 작은 방 2개)가 모두 2층에 있는, 엄마에겐 다소 불편한 집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엄마 혼자 거동이 힘드시기 때문에 2층에만 머무시게 하면 될 일. 다만 방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것이 지금의 문제였다.
결국 엄마 침대를 안방에 들여놓고 엄마와 한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엄마의 느닷없는 소리에 나 외의 다른 식구들이 잠에서 깨길 원치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참 성장기의 아이가 잠을 설치면 안 되기에 아이는 1층 거실로 내려보내고 남편은 안방과 마주한 아이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공간의 용도를 변경하면서도 '잘하는 것일까?' 수없이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보다 2배는 더 힘들 것이다. 몸도 편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너무 힘들어 견딜 수 없었기에 한 선택이다. 어느 쪽이 더 힘들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마음만은 편하고 싶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그저 때마다의 도리를 다할 것과, 존중을 항상 염두에 둘 것,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