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인생의 드라마가 있는 시기
다리를 다치고 나니, 평소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다녔을 거리도 택시를 타고 다닌다. 일단 출퇴근을 택시로 하니, 평생 탄 택시만큼을 최근 몇달간 탄 것같은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택시를 자주 타는 시기는 내 인생에서 힘들었던 시기들과도 절묘하게 겹친다.
입사하고 수습 딱지를 갓 뗐을 무렵, 한달짜리 장기 프로모션을 진행했었다. 매일같이 택시를 탔다. 그것도 짧지 않은 거리를... 게다가 그때는 술도 자주 마셔야했다. 학교 다닐 때만해도 술자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술자리가 아닌 사람이 좋았던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지금까지도 술은 적절히 마시는 것으로 자제하고 있다.
사회 초년생이어서 그랬던 걸까?
그때가 그리워질거라고는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다.
사람 때문에 힘들었고, 불안정한 미래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과연 적절한 사람인지 확신이 없어서 불안하고 또 불안했다. 그런데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니 조금 그립기도 하고, 살짝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왜일까?
뭘까?
힘들었던 기억은 여전한데, 그 사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미화되었기 때문인걸까?
아마 그때가 내 인생에 어떤 '드라마'가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낯선 곳에 툭 떨어진듯 모든 것이 새로웠고, 배울 것들, 배우고 싶은 것들이었다. 한편 내 자신은 너무도 부서지기 쉬운 상태였고, 하루하루 고민이 많았다. 그 부서지기 쉬운 상태를 말랑하게 만들었을 때 조금 달라졌다. 그런데 그게 처음 부딪치면 말랑해지기 쉽지 않다. 오히려 더 딱딱해진다. 영어 단어 Fragile, 딱 그상태가 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자극들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외부 환경이었고, 나의 흔들림은 성장통이었다.
직접 뭔가를 하고 부딪치고 깨지고 배우고, 그 시간들을 겪고 난 이후에 자신감도 생겼고 어떤 의미에서는 단단해졌다.
예기치 못한 일에 부딪치고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건과 갈등이 난무하던 드라마가 있었던 시기였다.
모든 회를 다 챙겨보진 못했지만, 최근 드라마 "프로듀사"를 보면서 김수현이 연기한 백승찬 역에 많이 공감했다.
얼떨결에 방송국에, 그것도 어쩌다보니 예능국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엔 이미 방송에 대한 열정으로 모인 경험까지 풍부한 사람들로 넘친다. 그렇게 간절하게 예능을, 방송을 열망해 본 적이 없는 승찬은 어딜가나 어설프다. 열정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모를 소외감도 느꼈을 거다. 그렇게 부딪치고 깨지는 와중에도 처음이기 때문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호한 열정과 하루하루 버티는 정신으로 방송국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다가 문득 봄을 보내며 깨닫는다. 버티고 버텨, 하루하루를 버텨 여기까지 온 자신도 모르게 달라진 모습을 보며, 그 모습을 잊지 않기로.
나도 몰랐다.
올 봄 이 짧은 시간에 나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비가 오던 그날밤, 학교에서 배워온 수많은 것들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곳에 온 것이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오늘이 끝일지, 내일이 끝일지 몰라
날 초라하게 만드는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 매일 밤 생각했다.
오늘만 해보고 아니면 접자
내일만 해보고 아니면 도망가자
그렇게 현재의 발 끝만 보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동안
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고
누군가는 홀로 거듭나기 위해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어떤 이들은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는 흔치 않은 기적을 체험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오래되어 더욱 소중한 것을 지켜내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 나는 처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벌써 멀어져버린 듯한 나의 처음.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을 것 같았던 자신을
오늘까지만 버티고 내일부터는 버티지 못할 것 같던 내 자신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럴 줄 모르고 시작되었던 인연
그 사람으로 인해 행복했던 이 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 프로듀사 12회, 백승찬 독백
그 모습에서 스물다섯의 나를 보았다.
내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찾고 싶었던 것은 그때의 나,
하루하루 버티면서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던 그 모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