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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던 최초의 기억

길을 잃고 발견한 것

by 나날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42p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길을 잃어본 마지막 경험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조차도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에서 내 위치와 목적지를 핀으로 고정시켜 손쉽게 최적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목적지를 향해 최단 경로로 나아가는 행위는 한편으론 가는 도중에 마주치는 풍경들을 사라지게 만들기도 한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온갖 노력들이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저만치 밀어낸다.


최초로 길을 잃었던 기억은 아직 남아있다. 미아가 될 뻔했던 기억이다.


네 살 혹은 다섯 살 무렵이다. 명절에 큰 할아버지 댁에 갔다. 당시 큰 할아버지 댁은 작은 시골의 시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1층에서는 장사를 하시고 2,3,4층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큰 댁 식구들이 살았다. 그때 나는 사촌들과 놀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혼자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았으나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밖으로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어린아이가 혼자 1층으로 내려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같이 놀던 사촌들도 친척 어른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다.


그때 내 세계는 너무도 좁았다. 엄마가 집에 없더라도 몇 걸음만 걸어 나가면 도달하는 어느 곳에 엄마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만 걷다 보면 엄마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걸음을 걸었다.


밖은 시장이었고 안쪽으로 안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엄마도 없고 내게 익숙한 풍경도 없다. 온통 낯선 것들 뿐이다. 언제 내가 울음을 터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아마 계속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학교 운동장 옆 쌀가게에 무작정 들어간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울며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길을 잃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거기가 쌀가게였다는 것, 거기에서 나보다 큰 언니들이 나를 토닥여 주고 경찰서에 신고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 모든 것은 언어화된 기억이 아니라 흐릿한 장면 장면의 연결들이다.


쌀가게 주인아저씨와 언니들이 우는 나를 붙잡고 온 길을 되돌아 가보자고 한다. 쭈욱 앞을 향해서만 갔으니까 되돌아가기는 쉬웠다. 가게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큰 할아버지 댁을 찾아나갔다.

"여기니?"

"아니요."

"그럼 이 가게니?"

"... 아니요..."


돌아온 길을 그대로 되짚어 왔는데도, 길이 끝났는데도, 더 이상 더 갈 곳이 없는데도 내가 나온 곳, 큰 할아버지 댁은 없었다. 그제야 더 큰 혼란이 찾아왔다. 악몽과도 같았다. 나온 곳은 있는데 들어갈 곳은 없었다. 낯익은 풍경이 모두 사라지고 내 손을 잡고 있는 이도 낯설다. 아무리 나를 다독여주려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잃은 듯한 순간이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른다. 그다음 기억은 그 길의 끝에서 나를 찾아 헤매던 엄마와 만난 기억. 더 정확하게는 엄마의 익숙한 품에 안긴 기억이다. 엄마도 조금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 익숙한 품.


나를 둘러싼 세계가 모두 낯설기만 했던 감각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구원과 같던 쌀가게 사람들의 손길,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엄마의 품 같은 것들이다. 차가웠던 순간들보다 따뜻했던 순간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극적으로 대비되는 경험에서 마음을 놓았던 순간들만 기억에 남겼을 수도 있다.


그 사건 후로 갖게 된 새로운 감각이 있다. 세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 그전까지 세발자전거로 어디든 갈 수 있었던 익숙한 동네 골목 밖에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것. 다행히 그 밖의 더 큰 세계에서 낯선 이들의 선의로 나는 오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이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려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로 인해 나의 두려움이 잦아들었음은 분명하다. 그때 내가 길을 잃고 발견한 것은 낯선 이들의 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익숙한 이들의 냄새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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