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간다
"학생일 때가 좋은 거야. 공부만 하면 되잖아."
그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 자체가 어려운데 뭐가 좋다는 건지.
이제야 저 말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공부가 쉽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방점은 공부"만"에 있었다. 그게 쉽든 어렵든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부러워했던 말이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들이 하나하나 늘어간다. 내가 선택한 역할도 있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역할도 있고 생각지도 못하게 맡게 된 역할도 있다. 어떤 역할은 즐겁고 편하기도 하고 어떤 역할은 고되고 힘들기도 하다. 그때마다 조금씩 다른 가면을 쓰고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게 진정한 나일까 혼란스럽기도 하다. 실은 그 모두가 다 나이다. 그 모든 역할의 총합이 나라는 것이 아니라 각각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조금씩 다르게 관계 맺는 가면 모두 나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모든 가면이 벗겨지는가? 그렇지 않다. 혼자 있는 모습이 진정한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도 혼자 남겨진 나와 마주하는 나의 한 가지 모습일 뿐이다.
그 모든 가면이 나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인생이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조금씩 다른 가면을 바꾸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그 시간이 다르기도 하고 어떤 가면에서 어떤 가면으로 넘어가느냐에 따라 시간이 더 필요하기도 하고 거의 바로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늘의 나는 그 가면들을 바꾸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가면들을 바꾸는 것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가면을 바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바로 스위칭이 되지 않아 괴로워했다.
'왜 나는 이게 안되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건 아직 새로운 가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나 스스로를 자책하고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걸리면 걸리는 대로 기다려줘야 한다. 내 자신에게 틈을 주어야 한다. 그 틈이 없이는 결국 모든 것을 다 놓칠 수 있으므로 그 틈새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숨을 내쉬어야 한다. 설사 그중 어떤 가면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결국은 버려야 하거나 버림받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나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