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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에 대한 긍정의 주문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해진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훨씬 큰 거짓말이죠."

by 나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중국행 슬로보트>에 보면 연락처가 적힌 성냥갑을 무심코 버리게 되어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중국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잊고 있었지만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외장하드를 뒤져보면 같이 찍은 사진이 어딘가 있을 텐데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게 그녀는 타국에서 만난 한국인으로 기억된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녀를 처음 본 건 호주 한 대학교의 언어학 수업에서였다. 나는 교환학생으로 호주 브리즈번의 한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 수업은 언어학 일반 수업이었다. 이란 출신의 선생님은 알아듣기 쉬운 영어로 강의를 진행해서 비교적 널럴하게(?) 수업을 들었다. 게다가 언어학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다루는 수업으로 큰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대형 강의였고 수업 내용도 어렵지 않았다.


그 많은 학생 중에서도 그녀가 눈에 들어온 건 그녀가 동양인, 높은 확률로 한국인처럼 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강의실 맨 앞쪽 구석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쭈욱 내밀고 마치 강의자에게 빨려 들어갈 듯한 자세를 수업 시간 내내 유지하며 듣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더욱 놀라웠던 건 교재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여기저기 밑줄이 쳐져 있었다. 종종 그녀는 수업이 끝난 후에 선생님에게 다가가 질문을 했고 나는 그녀의 그런 열정이 신기하게 느껴져 나도 모르게 눈여겨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호주에서 많은 것을 기대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여러 가지 것들로 살짝 무기력한 나태함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와 어쩌다 말을 나누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모도 패션도 누가 봐도 한국인이 분명한 내게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던 것 같기도 하다. 과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던 것 같은데, 사실 한국에서 언어학 수업을 들었던 나로서는 '뭘 이런 걸 다 물어보지'하는 수준의 질문이었던 것 같다. 동그란 안경에 앞머리를 넘긴 그녀는 그 과제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듯 진지하게 물어왔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리라는 기세였다. 모든 것에 시큰둥해 있던 나는 그녀의 그런 열정과 진지한 태도가 사뭇 신선했다. 그게 내 안에 어떤 것을 두드렸는지 우리는 수업을 전후해서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녀가 왜 그리 절박할 정도로 노력하는지.


그녀는 나와 동갑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LPGA에서 박세리가 우승을 하면서 TV에서 골프 중계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 뒤 우리나라는 골프 열풍이 불었고 중학생이 되자 지방 소도시였음에도 골프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녀도 그때 골프를 시작한 박세리 키즈였다. 중학생 때부터 스무 살이 넘어서 까지 줄곧 골프만 해왔고 프로가 되지 못하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호주로 유학을 왔다고 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고 성실하게 골프 훈련을 하던 근성으로 공부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결코 화려하거나 사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골프라는 운동은 내게는 너무나 먼 운동이었다. 나는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뛰며 겨우겨우 1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호주에 갈 수 있었다. 그런 내게 골프를 하다가 프로가 되지 못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온 그녀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다. 그녀는 운동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지금 공부를 하는 게 너무 편하고 좋아. 훈련할 때는 너무 힘들었거든. 골프는 비가 와도 경기를 하기 때문에 악천후에 대비한 훈련도 해. 날이 좋아도 비가 와도 훈련을 해야 하는 거야. 그땐 그게 너무 하기 싫었어. 그래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훈련했지. 하지만 결국 프로로 성공할 실력은 아니었던 거지. 호주로 유학 올 때 너무 늦게 공부를 시작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됐지만 막상 공부해 보니까 재미도 있고, 일단 비 오는 날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 좋아."


그때 내 안에 무언가가 깨지는 느낌이었다. 절박하게 수업에 매달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속으로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적당히 해도 될 텐데.' 하지만 그녀는 단순히 절박했던 게 아니라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삶에 대해 긍정하고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매우 진지한 자세로. 타인의 삶은 쉽게만 보였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내게 한 가지 더 질문을 남겼다. 열심히 노력해도 프로가 될 수 없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TV와 신문에서는 성공한 스타 선수들의 소식만 들린다. 하지만 더 많은 선수들이 성공을 향해 최선을 다해 훈련하지만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끝이 난다. 그들의 시간과 노력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쿨하게 그렇게 말했다. 헛수고였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때 우리 나이 스물셋이었다. 나는 스물셋에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막막한 미래를 힘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때까지 노력이 헛수고라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노력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삶을 있는 힘껏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환학생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그녀와 시티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둘 다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마음껏 비싸고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를 즐겼다. 이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그녀도 한국에서 보내주는 학비와 생활비로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파티를 누리듯 즐거워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기억나는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은 그날 환하게 웃으며 셀카를 찍는 그녀를 찍은 사진이다.


그때 그녀는 영수증인가 작은 메모지인가에 한국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무슨 동이었는지까지 기억이 나지만 당연하게도 정확한 주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분명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적어주었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옛 번호를. 그때 그 쪽지를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지갑에 넣고 다녔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연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언젠가 그 쪽지도 사라져 버렸다.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다.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해진다고 말하는 게 사실은 훨씬 큰 거짓말이죠(웃음). 그런 심한 거짓말도 없어요.

<거인의 별>도 마찬가지죠. 매일같이 맹렬하게 연습해서 결국 거인의 별이 되었다. 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이죠. 그걸 믿고 모두가 야구 연습을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약속된 장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285p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하철 사린사건 피해자 한 명 한 명의 개인적인 진실,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낸다. 그 책이 발간되고 약 두 달 후에 심리치료사 가와이 하야오와 대담을 갖는다. 위 문장은 그 대담 중 일부분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해진다는 거짓말. 지금의 나는 저 말을 폭넓은 의미로 해석한다. 어릴 때 우리는 저마다의 꿈을 갖고 모두 다 노력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반에서 대통령과 의사가 몇 명씩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확률이 낮은지 생각해 보고 냉소를 짓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저 말을 읽는 순간 잊고 있었던 호주에서 만난 한국인, 그녀가 생각났다.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훌륭해지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척하며 적당히 살아온 나는 아직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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