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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물자국 13화

고요의 온도

by 스밈

글쎄, 잘 모르겠어. 모르겠는데? 대체 왜? 끝없는 물음표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꽉 채운 잡생각을 떨쳐버리려 애쓰며 시퍼런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머뭇거리며 타자를 친다.


‘대체 왜 나에게만?’


황급히 백스페이스를 눌러 지워 보지만 망막에 맺힌 잔상이 다시금 떠돌았다. 컴퓨터 에러창처럼 끝없이, 연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와글와글, 난리법석이 된 머릿속에 손을 뻗기라도 하듯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었다. 물음들은 모여서 커다란 자음이 되고, 모음이 되고, 물음표가 되었다. 급기야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단어, 아니 음절만이 남았다.


‘왜.’


언제부턴가 이 질문은 머릿속에 진득하게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한 생각에 자괴감을 느낀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쓴웃음이 났다. 차가운 물이라도 들이부으면 나아질까? 천천히 정수기로 가 찬물을 한 잔 받았다. 띵동. 명랑한 효과음에 작게 웃었다. 내가 기분이 어떻든, 무슨 생각을 하든 너는 늘 똑같구나. 묘한 위로를 느끼며 찬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후, 하고 숨을 뱉으며 그제서야 어둑해진 집 안을 바라본다. 불도 안 켜고 뭐 해! 그러다 눈 나빠질라, 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떠오르는 어둠 속에서 노트북 화면만이 시퍼렇게 웅웅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앞에 앉으면 다시 에러가 날 거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식탁 의자를 하나 빼 몸을 기댔다.


추위가 살짝 가시는가 싶더니 내일은 눈이 온다지. 그것도 강설이 온다고 했다. 때 아닌 3월의 눈이라고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게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때 아닌 눈이라고 하기엔 매년 3월에는 늘 한 번씩 시리도록 눈이 내렸다. 그러다 꽃샘추위가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고 나면 어느새 사르르 녹아 피어난 개나리와 새순들이 천지에 색을 물들여 가겠지. 하지만 남의 골절보다 내 찰과상이 더 아픈 법이다. 다시 찾아온 추위에 파르르 떠는 이들에겐 봄은 영영 오지 않을 날들 같았다.


나 또한 그랬다. 차디찬 바람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뼛속 깊이 추위를 느꼈다.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날씨 때문이었다면 퍽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언젠가 나도 날씨 때문이었던 척, 못 이기는 척 맑게 개어 꽃피울 텐데. 어느새 무릎을 끌어모아 감싸앉았다. 잠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 팔을 포개어 그 위에 얼굴을 뉘인다. 절전 모드로 전환하며 픽 꺼진 노트북 덕에 집 안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멈춘 채 그저 고요했다.


고요함에도 온도가 있을까. 있다면 무슨 색일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검은색이겠지. 아니다. 검정은 너무 모든 희망을 빼앗긴 것 같잖아. 짙은 파랑이 좋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다 다시 창 밖을 본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빠르다. 주황색 가로등 아래 사람들의 얼굴이 잠깐씩 비칠 때마다 밖이 얼마나 추운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지. 어쩌면 고요함의 온도는 주황색일지도 모른다. 모든 걸 덮는 듯하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비추지 않나. 내가 처했던 상황은 잠시 잊게 해 주어도 현실과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마주하게 만들지 않는가. 저 주황색 가로등처럼 내가 미처 모르는 내 모습을 대면하게 만들지 않나.


고요함은 때때로 가장 잔인한 빛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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