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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물자국 15화

균열

by 스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단단한 줄 알았던 곳에 생긴 아주 작고 얇은 선 하나. 눈여겨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해서, 보았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선 알았는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를 기꺼이 지탱하던 중심축이 살짝 기울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울어짐은 조금 더 무거운 말 하나, 조금 더 날선 눈빛 하나만으로도 끝내 갈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눈 위에 덧칠을 하는 일상의 아득함, 귀를 닫아 버리는 삶의 소음들. 점차 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와 나의 입을 메우는 거품들. 그런 것들이 쌓여 갈 때마다 금은 조금씩 더 선명해져 갔다. 주의를 기울여 봐야만 했던 흔적이 그 존재감을 점차 드러내게 되었다. 저게 더 진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대체 뭐가 무너져 내리게 되는 거지? 초조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고사하고 나는 당장 내 눈과 귀와 입부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모든 것과 단절된 채로 오로지 나의 안에서 진동하는 균열만이 느껴진다.


빠지직. 아주 작은 소리에도 나는 쉽게 두려워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사이 균열은 갈수록 커져 나를 갈라놓으려 한다. 안 돼. 이대로 찢어질 수는 없어. 나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어. 더 이상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눈도 귀도 입도 가져가 놓고서는 왜 모든 것조차 앗아가려 하나. 아니다. 아직은 금일 뿐이다. 균열이 아니라 그저 금일 뿐이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중얼거린다.


힘껏 버텨 보지만 더 진해지는 금에 주춤하고 결국 겁먹어 웅크리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하나. 멈춰 있는데도 흔들리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잠재워야 하나. 사람이 내려도 여전히 움직임이 남은 그네처럼 나는 이리저리 휘둘린다. 중심축이 무너진 팽이처럼 여전히 돌고 또 돌아간다. 위태롭게 어지러운 움직임을 반복하며 이 혼돈의 끝이 어딘지를 묻는다. 겉으로는 멀쩡한 나는 사실 끊임없이 깨져나가고 있지 않나.


어느 새 나의 휘청거림은 끝을 향해 치닫는다. 쓰러지기 전 가장 크게 휘청대는 팽이처럼 어찌할 줄 모르고 허덕인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끝내 쓰러져 핑그르르 돈다. 갈라져 나온 또 다른 나를 본다. 갈라지고 싶지 않았던 나를 본다. 같은 균열을 공유한 사이. 묘한 긴장과 동질감이 공존하는 순간. 서로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희미한 자욱을 본다. 일부러 눈여겨 보지 않으면 전혀 발견할 수 없는 희미한 흔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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