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물자국 16화

물 먹은 거리

by 스밈

흘러내리는 빛들이 가득한 거리를 본다. 처음에는 사방으로 튀는 듯 하다가, 이내 흐릿하게 흘러내린다. 이제 보니 흐르는 것은 비단 빛뿐만이 아니다. 흔들리는 나무들, 찰랑이며 함께 하는 사람들. 출렁대며 한 데 뒤섞이는 길까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흘러내리다 섞이고 섞인다.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풍경들은 서로 한없이 겹쳐지다 끝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모습이 된다.


미술 시간에 가장 많이 그렸던 수채화. 붓에 물을 묻혀 물감을 적시고 종이 위에 바른다. 덧칠하면 할수록 질감이 더해지는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잘못 덧칠하면 종이가 울어버리곤 했다. 물을 잔뜩 먹어 울룩불룩 거칠어진 종이 위에는 더 이상 어떤 색도 올라가지 않는다. 파란색이든 검정색이든 뱉어내고 허옇게 뜬 채로 남는다. 물을 너무 많이 먹인 종이는 그래서 허옇고 거친 자국이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남아 있다. 어린 마음에 그 자국들이 참 보기 싫었다. 한 데 어우러지는 정경을 해치는 까슬한 자국들. 그 모습이 싫어 물을 더 먹여 자국을 지우려다 결국 종이를 찢어버린 일도 많다.


어우러짐 속에서 혼자 튀어나가는 것들. 물 먹듯 뒤섞인 거리에는 그런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일렁이며 어우러질 뿐이다. 허옇게 일어난 자국도, 까칠하게 거슬리는 흔적도 없다. 춤을 추듯 너울대다 수채화처럼 연결된 거리를 보며, 나는 눈가에 고인 물을 훔쳐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해진 거리가 낯설다. 아무것도 뒤섞이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들이 이상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진다. 차라리 허연 자국이 나았다. 까슬한 흔적들이 훨씬 더 나았다. 그게 나를 덜 낯설게 할 것만 같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색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혼자만 하얀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매한가. 입혀지려는 색을 끝끝내 거부하고 자신으로 남는 것. 물 먹은 거리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허둥지둥 뒤섞이다 각자의 자리를 잃고 만다. 꼭 나 같다. 오랜만에 다시 수채화를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대로 두어야 할 때도 있는가 보다. 물을 많이 먹으면, 물 먹은 대로.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5화균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