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깨지고 알게 된 것
그건 분명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큰 소리와 함께 심장이 오피스텔 지하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엄청난 소음에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놀랍게도 그 소음의 주인공은 바로 '거울'이었다.
평화로운 어느 주말 아침, 나는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수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잠시 누워있던 참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일 분이라도 더 쉬고 싶은 마음으로 밍기적거리던 찰나에, 정말 거짓말처럼 화장실 거울이 와장창 무너졌다. 내가 살던 오피스텔 화장실 선반은 전면이 거울인 슬라이딩 선반이었다. 선반 전체가 화장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거울이 산산조각 났다. 떨어지는 거울에 부딪힌 세면대마저 조각조각 깨져있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처참했다. 내 앉은키만 한 거울이 깨져 화장실 바닥 전체를 뒤덮은 참사의 현장. 그 파편들은 화장실 문밖까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운동복을 입은 채로 한참을 멍하니 깨진 거울 조각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심장이 크게 쿵쿵 뛰었다. 막막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무작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나의 슈퍼우먼, 엄마. 나는 울먹이며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엄마는 화들짝 놀라 우선 경비실에 연락하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반이 무너질 때 내가 화장실에 있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덧붙이셨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과거나 미래의 불행보다는 현재 내 앞에 닥친 불행이 늘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천만다행이라고 하기엔 내 앞에는 여전히 산더미 같은 유리 조각들이 쌓여있었다. 유리 조각을 쓸어 담을 빗자루 하나 없는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고,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 냉정한 세상. 사실 나는 이런 냉정함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곳에 이사 온 지는 한 달째였다. 이사 오기 전, 나는 한 오피스텔에 꽤 오래 살았었다. 내가 서울에서 처음 자취를 시작한 그곳은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오피스텔 정문 앞에는 작은 경비실이 있었고, 아저씨 한 분이 건물 전체를 관리하셨다. 5년 정도 같은 곳에서 살다 보니, 경비 아저씨와는 그래도 친밀한 유대 관계가 있었다. 서글서글한 엄마는 내가 이사 오던 첫날, 아저씨에게 주스 세트를 건네며 고향이 어디시냐고 인상이 참 좋으시다며 말을 붙였다. 우연히도 우리 가족과 경비아저씨는 고향이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지연(地緣)은 아직 힘이 셌다. 그 이후 나는 아저씨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집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거리낌 없이 아저씨에게 연락했고, 아저씨는 흔쾌히 도와주셨다. 나는 더운 여름에는 차가운 음료수를, 추운 겨울에는 뜨끈한 붕어빵을 슬며시 건네며 아저씨와의 유대를 키워나갔다. 나는 아저씨의 편애를 받는 입주민이 되었다. 아저씨와의 유대는 나의 자취 인생을 한층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 편안함에 익숙해진 탓에 나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냉정한 세상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상하게도, 세상이 한없이 냉정할 때 어디선가 불쑥 친절이 손을 내미는 경우가 나에게는 자주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깨진 세면대를 수리하기 위해 집주인과 연락을 해야 했다. 세입자와 직접 연락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집주인 때문에 나는 늘 부동산 아주머니를 통해 집주인과 소통하곤 했다. 내 상황을 들은 1층 부동산 아주머니는 쓰레받기와 신문지를 들고 찾아오셨다. 아주머니는 다치니까 가만히 있으라며, 수많은 유리 조각을 신문지로 걷어내셨다. 얼마나 놀랐겠냐는 말 한마디에 또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그렇게 거울 조각을 다 치우신 아주머니는 조만간 무너진 선반과 세면대를 수리해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동안 집안 여기저기서 유리 조각이 나올 테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그 고마움을 여기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눈물 나게 고마운 친절이었다.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거울의 파편은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자꾸 발견되었다. 화장실 타일들 사이에서, 신발장 뒤에서, 행거 뒤에서, 반짝하는 유리 조각을 발견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구석구석 꼼꼼하게 치운다고 유난을 떨었지만, 그 이후에도 어디선가 '짠'하고 나타난 유리 조각을 밟은 적도 몇 번 있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은 거울의 파편이 어딘가 계속 숨어있었을 테니, 나는 거울이 깨지고 나서 내내 그 파편들과 함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왜냐하면, 그 오피스텔을 떠나던 날, 모든 짐을 들어내니 숨어있던 아주 작은 유리 조각들을 또 발견하고 말았으니까.
깨진 거울은 불운을 가져온다는 미신이 있다. 그날 거울이 깨진 뒤,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불운이 더 자주 찾아왔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도 몇 있었다. 나의 깨진 평화가 그날 아침 산산조각 난 화장실 거울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은 여전히 냉정했다. 그럴 때마다 행운이 늘 나에게 손 내밀기를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나는 이제 혼자서 그 유리 조각을 치우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어렵지 않다. 주워 담으면 그만이고, 내다 버리면 끝이다. 문제는 그 과정과 결과에서 찾아온다. 유리 조각을 치우다가 자칫하면 손을 베이기도 할 테고, 파편이 나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다가 발바닥을 아프게 찌르기도 할 테다. 곳곳에 숨어있는 파편들을 완벽하게 예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찾아온다. 예상치도 못하게 삶의 평화가 산산조각 나는 일. 겨우 그 조각들을 치워놨더니, 잊을만하면 그 파편이 저 구석 어딘가 등장한다. 어느 날 갑자기 깨진 나의 평화의 파편들도 그렇게 오래도록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파편에 찔려 아파할 때마다 친절은 나에게 또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내 곁에 많은 사람이 베인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줬다. 얼마나 아프냐며 같이 울어주기도 했다. 깨진 유리 조각을 치워줄 사람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나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나는 행운아였다.
"세상은 늘 상처의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는 유리일 뿐이었다." 조해진 작가의 단편소설 「유리」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앞으로 살면서 많은 것들이 깨질 것이고, 나는 상처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인생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깨진 조각들을 스스로 치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파편으로 다친 상처를 숨기지 않고 타인에게 내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들이 나의 이런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운 좋게도, 나에게 손을 내민 많은 친절 덕분에 나는 ‘상처의 가능성이 내제되어 있는 유리’ 같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나는 깨진 거울이 가져오는 불운도, 행운처럼 찾아오는 그 친절들로 이겨내고 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