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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담 Apr 16. 2024

출신과 학위에서 오는 갈등2

문과와 이과

 필자는 수포자이자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이다. 지방대를 나왔고 학사에 행정직으로 지방 기관에 입사했다. 대단한 학력과 경력을 기대한 분들에겐 죄송하다. 입사 시점에는 기타 기관이었다가 몇 년 후 갑자기 행안부에서 지방 공공기관으로 지정해 버린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지만… 어쨌든 팩트는 지방출자출연기관 출신이다.

 또 한 번의 이직 준비가 그 무렵부터 시작됐다. 지방 공공기관으로 지정되자마자 전에 없던 지자체의 통제와 압박이 들어왔다.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튼 그때부터 심해졌다. 채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전에는 그냥 했던 일을 이제는 지자체의 승인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느렸던 의사결정 속도는 더더욱 느려졌고 인사 등 내부의 일에 참견을 넘어 지자체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믿고 의지하던 사수가 갑자기 이직해 떠나버렸고 나도 지치다 못해 결국 퇴사했다. 이직 준비부터 퇴사 결심까지 3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없던 노조가 만들어졌고, 노조 간부가 되었고,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그 시점에 탈출 러시가 시작돼 이미 이직에 성공한 전 동료들을 일부러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다. 특히 노조 간부를 지내며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관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이 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혹시 노조에 반감이 있는 분이라면 너무 색안경 끼고 보지 말길 바란다. 공공기관의 노조는 대부분 조끼 입고 머리에 띠 두르고 시위하는 노조가 아니라 대화와 협의로 젠틀하게 활동한다. 

 아무튼 굳이 내 개인사까지 꺼낸 이유는 그 3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도 해보고 이직도 해보고 일도 해본 경력자로서 공공기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현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번에 쓸 내용은 앞서 적은 객관적인 부분보다는 근무하면서 때론 대놓고, 때론 미묘하게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다뤄보겠다.

 같은 부처의 기관이라도 법인이 다르면 문화도 한참 다르다. 이 챕터의 소제목에 적은 것들은 공공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갈등의 근본 원인을 적어본 것이다.



이과와 행정직연구직(기술직)     


 갈수록 문과 출신의 설 자리가 점점 불안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문과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취업 시장에서는 이과에 비해 쓴맛을 더 많이 본다(취준생 때 주량이 많이 늘었다).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옆방 공대생들은 어쩜 그리 삼성이고 엘지고 취업이 잘 되던지… 당시엔 참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것을. 필자도 공부 못한 건 아니었다. 외국어와 사회 계열 과목들은 1등급 나왔다. 수학이 12점 나와서 그렇지…(차라리 평소처럼 찍을 걸 괜히 안 하던 짓 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아무튼 지방대 경영학과 출신이 대기업에 들어가기란 어불성설이며(들어가봤자 이상한 계열사로 빠지더라), 중소기업은 가기 싫은데 그렇다고 공무원 시험을 치르기엔 빨리 취업하고 싶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지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취업 시장에서도 빛은 있었다. 

 문과 출신이 아무리 푸대접받아도 경영, 회계, 인사, 홍보, MIS 등 행정직군은 조직에 없어선 안 되는 분야이고 이과 녀석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정권에서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시키고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거기에 지방인재전형 가산점은 요즘 말로 ‘개꿀’ 그 자체였다. 공공기관이라면 어디 동기 모임 같은 데 가서 기죽진 않을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입사했는데 신세계가 열렸다.


 이번 챕터는 취준생에게 들려주기보다는 조금 자전적인 이야기다.     

 전 직장은 직원들이 모두 ‘연구원’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행정직인데도 전임연구원(대리급)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이상했던 것은 또 있었다. 회사엔 직원의 7~80%가 엔지니어나 R&D, 국책 사업을 담당하는 진짜 연구원들이었는데 그분들이 우리 행정직들을 어려워했다. 자기 분야에서는 꽤 베테랑인 사람들이 회계, 예산, 감사팀 등 행정 담당 사무실만 가면 쭈뼛거렸다. 기획팀에 입사한 지 1년이 안 된 나에게도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인 선배들이 많았다. 물론 옛날처럼 직급 높고 나이 많다고 반말하는 시대는 지났고, 다른 팀과 원활한 업무 협조를 위해 상호 간에 예의를 갖추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분들이 꽤 있었다(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 팀 후임은 어찌나 지독하게 갈구던지… 깜짝 놀랐다). 어쨌든 문과 출신으로 연구직들이 행정직을 무시하거나 깔보는 일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던 내겐 정말 의외였다.

 그런 문화 덕에 생각보다 편하게 적응하긴 했다. 그래도 당연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행정직들을 보통 ‘간접 부서’ 또는 ‘지원 부서’라고 표현한다(나는 행정 부서라고 표현하겠다). 말 그대로 현장에서 일하는 연구‧기술직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한다. 그들이 사용할 예산을 편성해 주고, 지출 업무를 처리해 주며, 법‧규정에 위반되는 사항은 없는지 점검한다. 그 외 인사, 채용, 시설관리, 홍보 등 각종 행정 업무를 전담한다.

그런데 국책 사업을 많이 따오든 장비를 돌려 수익을 내든 ‘직접 돈을 벌어오는’ 역할은 현장에 있는 연구직과 기술직들이다. 내가 경영학을 전공하고 그들을 지원할 만한 자격과 경력을 갖추었더라도 내 월급은 그들이 벌어온 돈으로 받는 것이다. 기관 운영비를 나라에서 100% 지원받는 기관이면 모르겠지만 그런 기관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연구직들이 자기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행정 부서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일했다.     


행정직의 갑질일까, 연구직의 무관심일까.

이직을 준비할 때 괜찮은 기관의 공고가 뜨면 항상 블라인드를 먼저 들여다본다. 그런데 생각보다 행정직에 대한 불만, 불평, 부러움이 섞인 글이 많다. 심하게는 행정직들이 갑질한다는 글도 심심찮게 보인다. 

             

한 정출연의 블라인드 리뷰


 행정 부서는 전 부서를 담당하다 보니 아무래도 정보가 많이 모이고 빨리 접할 수 있는 곳이다. 기관장을 독대할 기회도 많고 인사 업무 같은 경우는 보안성이 높다. 회사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기획 부서(기획조정실, 전략기획실 등)에 행정직들이 많은 편이기도 하다. 기획 부서는 회사가 배라면 선장에게 올바른 정보를 보고하고 내려온 지시를 정확하게 수행해서 배를 조정하는 항해사 역할이다. 어쨌든 이런 중요한 역할을 주로 행정 부서가 담당하면서 행정직의 힘이 세지고 연구직들의 불만이 생긴다.

 군대를 간부나 행정병으로 다녀온 분들은 대대 인사과나 작전과 등 참모부에서 얼마나 일거리를 많이 주는지 경험해 봤을 것이다. 소대장으로 군 생활할 때 참모들이 시킨 일을 먼저 하느라 정작 훈련도 제대로 못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요즘 군대는 전투력보다 행정력이 우선되는 실상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참모들은 또 그 위에서 얼마나 닦달했길래 훈련 뛰는 소대장까지 불러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파고 들어가면 결국 어떤 장군의 말 한마디였을 일이 사단, 연대를 거쳐 대대, 중대까지 내려오면 훈련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다. 인사권을 가진 장군과, 잘못 보이면 진급 날아갈까 봐 부당한 일에도 반항 하나 못 하는 참모들. 어디서 많이 들어봤고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이야기. 만성적 관료주의를 앓고 있는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시 돌아와서 문제는 이렇게 행정의 힘이 세지면 현장을 무시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행정 부서에서 ‘연구직 개개인이 하는 일이 작아 보이고 내가 더 크고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을 때 두 직종의 괴리감은 커진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는 거야 말릴 이유가 없지만, 그걸 넘어 상대방 일을 무시하면 그땐 문제가 되는 거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중에는 결국 서로 뒤에서 욕한다. 문과‧사회계열 출신인 행정직은 연구직들이 행정을 너무 모른다고 욕하고, 이과‧이공계 출신 연구직은 행정직들을 전문 분야도 없으면서 갑질한다고 욕한다. 다음 단계는 이제 서로 자기 잇속만 챙기다가 회사는 점점 산으로 가게 되는 거다.

 물론 일부 행정직의 업무는 회사 전체를 다루고 세세하게 고려해야 하므로 상당한 업무량을 자랑하기도 하고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내가 8년 동안 했는데 모를 리가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만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업무를 권력처럼 생각하진 말자는 거다. 기획 분야의 행정직이 마치 자신이 기재부 공무원이라도 된 것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권력처럼 누리면 그땐 갑질이 된다.

사실 연구직들이 행정을 너무 모르는 것도 맞다. 정해진 절차와 규정이 있는데 ‘급하니까 그냥 해주세요’라는 말을 들을 땐 답답하기 그지없다. 행정직의 영향력이 약한 기관에 있다가 오신 분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그런 곳에서는 단순 행정 사무를 맡기려 알바나 계약직을 편하게 쓰고 행정직을 경시한다. 그럴 땐 위 예시의 블라인드 리뷰와는 반대되는 글이 달린다.     

배려 좀 하자

 결국 행정직의 갑질이냐, 연구직의 무관심이냐의 답은 둘 다다. 행정은 현장을 배려하고, 현장도 행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상황들 모두 상대방 영역의 무지에서 생긴 문제다. 서로가 없으면 불편한 이와 잇몸의 관계인데 배척할 이유가 없다. 연구직이 없으면 내 월급은 어디서 나올 것이며, 행정직이 없으면 자기 일도 바쁜데 그 귀찮은 지출, 예산 업무를 다 할 것인가. 전 직장 제도 중에서 그나마 맘에 드는 게 하나 있었다면 연구직과 행정직 간 상호 수요가 있다면 서로 순환근무를 허용한 부분이다. 자기 분야의 일에 슬럼프가 온 직원이 지원하곤 했는데 연구직 직원이 1~2년 정도 행정 업무를 겪고 원래 일로 돌아가면 업무 능력이 많이 향상되곤 했다. 반대의 경우는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가능하다면 커리어 중에서 한 번쯤은 다른 직종의 부서를 겪어보는 게 멀리 보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

요즘은 군대도 ‘상호 존중’을 핵심 가치로 추구하는 시대다. 배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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