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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담 Apr 11. 2024

출신과 학위에서 오는 갈등

학사와 석, 박사

 필자는 수포자이자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이다. 지방대를 나왔고 학사에 행정직으로 지방 기관에 입사했다. 대단한 학력과 경력을 기대한 분들에겐 죄송하다. 입사 시점에는 기타 기관이었다가 몇 년 후 갑자기 행안부에서 지방 공공기관으로 지정해 버린 특이한 케이스이긴 했지만… 어쨌든 팩트는 지방출자출연기관 출신이다.

 또 한 번의 이직 준비가 그 무렵부터 시작됐다. 지방 공공기관으로 지정되자마자 전에 없던 지자체의 통제와 압박이 들어왔다.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튼 그때부터 심해졌다. 채용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전에는 그냥 했던 일을 이제는 지자체의 승인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느렸던 의사결정 속도는 더더욱 느려졌고 인사 등 내부의 일에 참견을 넘어 지자체가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믿고 의지하던 사수가 갑자기 이직해 떠나버렸고 나도 지치다 못해 결국 퇴사했다. 이직 준비부터 퇴사 결심까지 3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없던 노조가 만들어졌고, 노조 간부가 되었고, 나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그 시점에 탈출 러시가 시작돼 이미 이직에 성공한 전 동료들을 일부러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다. 특히 노조 간부를 지내며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관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던 것이 이 책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혹시 노조에 반감이 있는 분이라면 너무 색안경 끼고 보지 말길 바란다. 공공기관의 노조는 대부분 조끼 입고 머리에 띠 두르고 시위하는 노조가 아니라 대화와 협의로 젠틀하게 활동한다. 

 아무튼 굳이 내 개인사까지 꺼낸 이유는 그 3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도 해보고 이직도 해보고 일도 해본 경력자로서 공공기관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현실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번에 쓸 내용은 앞서 적은 객관적인 부분보다는 근무하면서 때론 대놓고, 때론 미묘하게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을 다뤄보겠다.

 같은 부처의 기관이라도 법인이 다르면 문화도 한참 다르다. 이 챕터의 소제목에 적은 것들은 공공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갈등의 근본 원인을 적어본 것이다.


학사와 석박사     

 단도직입적으로 공공기관에는 석‧박사 출신이 많다. 공공 연구를 위한 사명감을 갖고 오신 분들도 있지만, 대기업에 갈 여력이 안 됐거나 대학에 남기 싫었던 분들도 있다. 그들에게도 공공기관은 최적의 선택에 해당한다.

 어쨌거나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직원들의 진학이나 학업을 이어가는 데에도 너그러운 편이다. 필자도 학사로 입사했으나 팀장과 선배들이 대학원 진학을 적극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입사 2년 차에 대학원 입학을 하고 석사 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다. 학업과 앞으로의 진로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드물지만 학비의 일부라도 지원받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단, 근무 기간에 획득한 학위는 나중에 이직할 때 학위 경력에 대한 중복 인정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 미리 알아두자.

 또 수료만 한 상태라면 논문을 마치는 데도 은근히 도움이 된다. 보통 자기 전공에 맞는 업무를 하고 있을 테니 업무와 연결된 내용으로 논문 주제를 삼아 학위를 마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출연 같은 곳은 아직 수료 상태라면 되도록 빨리 학위논문을 마치도록 권장한다. 업무 중 연구 논문 기고도 중요한 실적으로 여기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만의 리그?

 학력이 높은 사람이 많다 보니 회사 분위기 자체는 세련된 편이다. 나이 많고 직급 높다고 무조건 반말 찍찍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회식 문화도 깔끔했다. 이전 직장에서 주 2~3회 이상의 회식에 한 번 마시면 2차 노래방에 3차까지 기본으로 갔던 분위기에 비하면 정말 큰 장점이었다.

 다만 박사가 아니라면 은연중에 차별이나 무시를 당할 수도 있다. 일단 호칭부터 차이가 난다. 보통 성 뒤에 직급을 붙여 ‘김부장’, ‘최선임’ 이렇게 부르는 게 일반적일 텐데 그들은 다르다. 같은 김 씨에 책임연구원이라도 박사 학위가 있느냐에 따라 누구는 ‘김책임’이 되고 누구는 ‘김박’이라 부른다. 공공기관만의 특성은 아니고 대기업 연구소나 해외에서도 빈번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 학위가 승진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같은 점수로 승진 대상자 둘이 올라갔다면 박사 출신이 최종 승진자가 되는 식이다. 이 경우 인사권자나 부서장 역시 같은 박사 출신일 확률이 높다.

 물론 박사 학위를 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몇 년 동안 논문 쓰고 연구하느라 고생한 점은 인정한다. 그 고생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호칭을 다르게 부르는 것까지야 이해한다. 하지만 학위는 학위에서 그쳐야 하지 않을까. 한 직급 높게 들어왔든 연봉을 좀 더 잘 책정받았든 입사 시점에 이미 학위에 대한 경력인정은 받았을 거다. 입사 후에는 업무 실적이나 역량을 더 중요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좋은 인사제도일 것이다.      

   

 꽤 괜찮은 평(3.9점)을 받은 한 정출연의 블라인드 대표 리뷰이다. 여기서 ‘물박사’란 박사 학위는 있는데 연구 능력이 부족하고 심하면 자기 세부 전공에 대한 지식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독자적, 주도적으로 연구 제안을 못 하거나 학술지에 단독 또는 제1 저자로 논문을 등재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다. 자기 분야라도 잘 알면 다행인데 괜히 어려운 말 쓰면서 다른 분야를 아는 척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곤 한다. 정치권에서는 논문 표절로 박사 학위를 딴 사람을 공격하는 데 좋은 무기가 된다. 대학에서 ‘저 사람이 어떻게 교수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냥 박사 학위‘만’ 있고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물박사가 기관에 생각보다 많다. 그 답답함은 직접 겪지 않는 이상은 모른다. 직접 본다면 학위와 인성 또는 일머리가 비례하진 않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학벌도 마찬가지다. 명문대 나온 물박사도 많이 봤고, 지방대 나온 박사임에도 협력을 구하기 위해 누구나 아는 미국 대기업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진짜 실력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공공기관 경력이 학벌과 학위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뭐든 지나치면 안 좋은 법이다. 학벌, 학위 우선주의가 만연한 곳은 사람들이 떠나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과학‧기술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긴 독일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박사만 별도 인증 절차 없이 바로 박사(Dr.)로 인정해 준다고 한다. 언젠가 우리나라 박사도 학위 소지 자체만으로도 진심 어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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