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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담 Apr 08. 2024

공공기관 사내 문화

feat. 공직 사회

  

“끔찍하게 경직되어 있다.”

 내가 쓴 소설 『신의 직장. 신이 떠나다.』에서 나오는 문구 중 하나다. 공직사회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단어는 없을 것 같다.

 공공기관도 공무원 못지않게 정말 보수적이다. 경험상 몇몇 연구개발목적기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랬다. 이는 전후 나라 재건 과정에서 민간보다는 공권력을 동원해 정부 위주로 경제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영향이 크다. 독재 시절을 겪으며 빠른 성장을 이뤄내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보수적이고 시키는 것만 하게 된 공직사회 문화를 얻었다. 

 공공기관은 나라에서 만든다. 새로운 기관을 만들 때 공무원들은 관련 법을 개정하고 민간인인 실무자들은 내부 정관과 규정‧규칙을 만든다. 그럴 때마다 기존 비슷한 기관들의 그것을 참고하게 되므로 큰 틀에서는 수많은 기관의 규정이 거기서 거기다. 그보다 더 내려가서 건국 초기에 만들어진 기관은 아마 정부 조직의 법령을 참고하거나 심하게는 일본 기관의 것을 얻어다 참고했을 것이다.

 즉,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기나긴 독재 등을 거쳐 만들어진 우리나라 특유의 관료주의 문화가 공공기관 설립 때부터 그대로 흘러들어오게 됐다. 올해 정년퇴직하는 분들은 독재가 끝난 시절에 입사했겠지만, 그들의 상사는 전부 그런 문화가 배인 분들이었을 거다. 신생 기관이든 신입사원이든 처음에 접하고 받아들인 문화의 힘은 크고 세다. 지금 과장/선임연구원급을 하고 있을 1980년 전후 세대들이 부장, 임원급이 되어야 그나마 공공기관이 조금 유연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일을 위한 일이 난무한다.

 글을 쓰는 지금 순간에도 인상이 써질 정도로 강하게 얘기하는 이유가 있다.

 2021년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사건이 일어나고 1년 후. 바뀐 정권에서는 공공기관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명목으로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을 만들어 모든 부처와 지자체, 기관에 배포했다. 이후 공공기관은 이 가이드에 따라 재무 건전성 강화, 조직 슬림화, 기능 정비, 경상경비 절감, 과도한 복리후생 축소 등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회상하면 우리 팀이 그 업무를 맡았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힘들었던 기억이고 퇴사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후 기재부에서는 ‘공공기관 혁신 TF’를 만들었다. 부처에서는 각 기관에 가이드를 참고하여 자체적으로 ‘기관 혁신 계획’을 만들어 보고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그런데 제출 기한이 단 열흘이었다. 다른 부처의 기관도 2주 이상 걸리진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라. 제목이 혁신 계획이고 단기적 조치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 정책적으로 강하게 추진하는 일이었다. 좋은 기삿거리를 찾은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헤드라인에 기사를 싣기 바빴다. 연일 정치인들의 성명이 이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만큼 중장기적이고 무게감이 컸던 사안이었다. 그런데 열흘이라니?

 경영평가 보고서나 감사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도 전 부서가 달려들어 최소 한 달에서 공들여 쓰면 두 달은 족히 걸린다. ‘기관 혁신 계획’은 그에 못지않을 정도의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열흘 동안 밤을 새워서 어떻게든 만들어 내더라도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는 시간에 질 좋은 보고서가 나오긴 힘들다. 웃긴 건 갑자기 일이 떨어진 공무원들도 ‘일단 빨리 내라’는 반응이었고, 회사 윗선에서도 ‘적당히만 해라’는 말이 나왔다. 겉보기만 그럴싸한, 실속 없는 기관 혁신 계획을 제출하고 얼마 후, 나는 퇴사했다.

 

 난 정치를 잘 몰라서 당시 정치권에서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는 모르겠다. 2년이 지난 지금 회사에 남아있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저 양식대로 계획서를 제출하고 형식적으로 점검하는 연례행사 수준의 일이 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번 생기면 잘 없어지지 않는다. 전 정권에서 추진했던 정책은 잘만 엎으면서, 전임자가 했던 일은 안 하면 큰일 난다. 

 조금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또 일을 위한 일을 만든다’라고 표현한다. 조금만 무언가가 이슈가 생기면 양식을 만들고 공문을 보내고 자료를 만든다. 지난주에 왔던 A 부처 B팀에서 내려온 일도 아직 못 끝냈는데 이번 주엔 C팀에서 오고, 다음 주에는 B 부처 D팀에서 양식이 날아온다. 어떻게든 쳐내고 쳐내도 끝이 없고 그에 대한 피드백도 없다. 다들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를 없애고 혁신적으로 변하자고 주장하지만, 말뿐일 뿐.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일을 만들어 내는 게 공직사회다.     


혁신 없는 혁신을 말로만 추구한다.

 2023년 난리가 났던 새만금 잼버리 사태가 종료된 이후 공무국외여행을 다녀왔던 공무원들의 부실한 출장 실태가 드러난 적이 있다. 필자 또한 전국의 다른 기관 직원들과 ‘혁신 벤치마킹’이라는 주제로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마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들이 나가는 공무국외여행의 주제에 ‘혁신’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전부 세세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참 혁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면서도 멀리하는 아이러니란.     


“한국에서 온 기관들은 다 똑같다. 벤치마킹이라고 와놓고 그냥 형식적으로 듣기만 하고, 돌아가서는 하나같이 실천하지 않는다. 솔직히 왜 오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한 경제개발기관에 방문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관계자가 우리에게 했던 말이다. 우리 말고도 많은 한국 공무원과 기관 직원들이 수없이 다녀갔단다. 업무 협약을 맺거나 귀국 후 이런저런 네트워크로 연결된 곳들도 있었지만, 결실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공식 방문 행사가 끝나고 남아서 질문을 던지던 몇몇 사람들만 있던 자리였는데, 그 관계자나 전달해 준 통역사나 우리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앞서 말했던 기관 혁신 계획 외에도 전략기획팀에 있으면서 혁신이나 개선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수없이 만들었다. 나는 ENTJ 성향인데 현장 직원들이 일하기 불편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 부분을 개선하거나 바꾸는 것을 좋아했다. 한마디로 기획 일이 잘 맞았다. 그런데 회사가 나랑 안 맞았다. 

 일반 기업의 최고 가치가 이윤 추구이고 자금줄인 투자자들을 무서워한다면, 공공기관은 법‧규정을 준수하고 예산을 올바르게 썼는지가 최고 가치이다. 예산을 주는 공무원과 부처들이 자금줄이니 그들을 무서워한다.

 세금으로 받은 예산을 더 절약하고 더 많은 기업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일을 건의해도 규정대로 하는 게 우선일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법과 규정은 바꾸는 절차도 어렵고, 한 번 개정하는데 다방면의 검토와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니 잘 바꾸려 하지 않는다. 공공성과 민주성 외에도 효율성과 합리적인 면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이니 쉽지 않은 건 안다. 하지만 불편함과 낭비가 많은 일까지도 그냥 하던 대로만 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공적인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닐까.

 기관 혁신 계획을 제출하고 사직서를 낸 것은 8년 동안 꾸준히 이런 답답함에 지치고 넌덜머리가 났던 이유였다.

 윗분들은 본인의 연임이나 더 높은 자리를 위한 성과를 위해 열심히 혁신안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한다. 하지만 실무자들이 열심히 아이디어를 담아 개선점을 제시해도 윗선에서 잘리기 일쑤다. 위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중간에서는 윗분들 심기를 건드릴 만하거나 자신이 뒷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일은 일찌감치 잘려 나간다. 열심히 칼질당한 보고서에는 허울뿐인 혁신만 남는다(제목만은 언제나 거창하다). 

이럴 거면 혁신이라는 말을 말지…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창의적이고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공공기관을 추천하지 않는다.     


회사 다니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

규정에 있어? 예산 있어?     


규정이 없으면 고치고, 예산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게 진짜 혁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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