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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담 Apr 24. 2024

도전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다 읽었다면 지방 기관이라고 다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이름난 공기업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님을 알게 됐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공기관의 메리트는 워라밸이나 안정성이 아니다. 공공기관이라는 포지션상 공무원과 사기업 각각의 좋은 점을 잘 융합시킬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특히 복지 부분은 얼마든지 공무원법과 근로기준법 사이에서 장점만 얻어다가 적용할 수 있다. 규정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할 때 다른 법‧규정을 많이 참고하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좋은 것만 쏙 뽑아내서 참 맛있게 버무리는 일을 참 재미있게 했었다. 행정직의 장점이랄까.

 물론 공공기관과 사기업의 장점을 잘 조율한 회사가 있는가 하면, 공공기관과 사기업의 단점만 남는 회사도 많다. 후자는 예산, 규정 등으로 공무원에게 종속된 정도가 심한 경우다. 전자는 정출연이 많았다.

 자꾸 정출연 얘기만 해서 현재 정출연에 근무 중이신 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근무하는 곳이 가장 힘든 법이다(예비역들이 모이면 다들 자기 부대가 빡셌다고 한다). 어쨌든 그럼에도 공공기관 중에서는 정출연(과학기술계)이 가장 자율성과 혜택을 타 기관에 비해 많이 누린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일이나 회사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 듣기 싫어하고 성취욕도 많고 보통 워커홀릭이라 불린다. 이런 유형이라면 특히 공공기관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성취욕이 높고 직장 생활에 야망이 있는 사람에겐 큰 단점이다. 공공기관에서 직원 출신으로 경영진이 되기란 쉽지 않다.

 ‘화성에서 온 경영진’ 챕터에서 썼듯이 일단 경영진 자리는 외부 초빙이 많기 때문이다. 경영진 공고가 나면 해외 명문대 출신, 회계사 등 전문직, 어디 교수, 대기업 부장급, 고위 공무원, 다른 기관 임원 출신 같은 사람들의 지원서가 수두룩하게 들어온다. 내부 직원 출신이 회사를 가장 잘 알텐데, 경영진을 심사하는 건 내부 인사가 아니다. 소관 부처 공무원이나 방금 나열했던 소위 외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심사위원이 되어 지원서를 검토하고 면접을 본다. 일반 직원도 외부 사람들이 와서 심사하는데 이는 부정 채용이나 인사 청탁 등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객관적인 시선에서 내부 직원은 외부 경쟁자의 화려한 이력에 비해 아무래도 빛이 바랜다. 또한 경영진은 나이 제한이 딱히 없어서 이미 은퇴하고 환갑이 넘은 경력 빵빵한 분들도 계속 지원한다(집에서 좀 쉬시지…).

 사기업은 일 잘하면 상무고 전무고 임원도 될 수 있는데 기관에서는 부장, 수석연구원 정도가 최선이다.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유리천장처럼 존재한다.

 이는 특히 여성에게 더 불리하다. 필자의 전 직장에선 30개 가까운 팀장 자리 중에서 여성 팀장은 5명이 채 되지 않았고 여성 경영진은 한 번도 없었다. 다른 기관을 둘러봐도 상대적으로 여성 비율이 많은 바이오‧생명공학 분야가 아니면 여성 경영진이 극히 드물다. 사기업에선 여성 임원, 대표는 물론이고 심지어 공무원도 여성 장‧차관도 나오는 세상인데 공공기관은 참 느리다(군대도 여성 투스타가 나온 지 오래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공무원보다 더 폐쇄적이기도 하다.

 또한 연공서열 체제에서는 본인 성과에 대한 보상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돈이든 승진이든 보상은 누구에게나 열심히 일할 동기부여가 된다. 열심히 일했는데 앞에 몇 년씩 밀린 선배들을 보고 자기 순번을 세어 보면 막막하다. 내 순번이 가까워질 때까지 슬렁슬렁 일하다가 어느새 자신이 싫어하던 선배들의 모습이 되어 간다. 월급루팡은 처음부터 월급루팡이었던 게 아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운 상무가 자기 동기인 윤 상무(악역)에게 한 대사가 있다.


“아무리 사람 좋은 사람도 절대 못 봐주는 게 있어. 내 뒤에 서야 될 것 같은 놈들이 앞에 서는 거. 그거 뚜껑 열려. 잠이 안 와.”


 줄 잘 서고 정치 잘해서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얄밉긴 하겠지만, 직장에서는 정치질도 능력이다. 그런데 별 노력 없이 가만히 기다리다가 먼저 승진하는 사람을 보면 ‘현타’가 더 세게 온다. 

 당신의 노력과 성과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은 당신의 권리다.          



잘하면 일만 더 늘어난다.


 처음부터 일을 너무 잘, 그리고 열심히 하려 하지 말길 바란다.


“어, 얘 이 업무 잘하네?”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당신은 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 얘 일 잘하네?”라는 말이 들리면, 그 이후로 어려운 일은 당신 몫이다.


 물론 어느 직장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월급루팡이 즐비한 공공기관에서 좀 더 많이 겪을 수 있다.

안정에 취해 의욕이 사라진 월급루팡이든, 자리에 취해 일을 안 하는 물박사든. “이것 좀 해줘.”라며 자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당신에게 넘길 사람이 많다. 잘못하면 그들의 업무만 해주다가 정작 내 일이 밀려 퇴근도 못 하거나 결국 펑크가 날 수도 있다. 당신의 업무가 잘못되었을 때 그들은 책임져 주지 않는다. 거절할 성격이 안 된다면 처음엔 가만히 있자. ‘제가 할게요.’는 나중에 해도 된다. 신입 때는 시키는 일만 잘해도 인정받는다. 결과가 좋으면 다행인데 나서다가 독박 쓸 수 있다.

 회사에서 슬럼프나 번아웃이 올 기회는 넘쳐난다. 신입 때는 잘하고 열심이던 친구가 나중에 설렁설렁 일하면 안 좋은 평은 배로 돌아온다. 처음엔 돋보이지 않더라도 천천히 우상향 곡선을 그리면서 성장하는 게 더 낫다.     

 

또한 정권과 정책에 따라 오늘과 내일의 근무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은 하루하루 성실히 또 열심히 자기 업무를 해내고 있겠지만, 다른 곳에서 사고 하나 터지면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안 그래도 제한적인 것이 많은 공공기관에 제약이 하나 더 생기게 된다. LH 사건 이후 1년 넘게 시달렸던 온갖 감사와 혁신 계획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요즘은 군대 다시 가는 꿈 대신 그때 꿈이 나온다).

 법과 규정은 언제나 그걸 악용하는 몇몇 사람들 덕에 자꾸 무언가가 추가되고 강화된다. 멀쩡하게 제 몫 다하는 기관도 옆에서 사고 하나 터지면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공무원들을 보내 기관들 점검에 나선다. 잘못 한 게 없는데 죄지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결국 다른 곳, 다른 이들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명감과 근무 의욕이 사라지는 지침이 내려온다. 피해는 죄 없는 사람들이 받고 언젠간 또 제도의 허점을 악용해서 이익을 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공직사회는 그런 곳이다.     


 유퀴즈에서 언젠가 구글 수석 디자이너라는 분이 출연해서 남긴 말이 인상적이었다.


“회사랑 썸을 타야지, 연애를 하면 안 된다. 회사에 올인을 하니 배신감 느껴지고 화나는 법이다. 충성했는데 회사는 날 안 알아준다? 회사를 너무 깊이 사랑해서 그렇다. 썸을 유지해야 관계가 오래간다. 직장과 나를 동일시하는 건 금물이다. 직장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순간, 위기는 자주 찾아 온다.”


 나에게 하는 자조적인 말 같았고 퇴사한 후에야 방송을 본 게 안타까웠다. 공공기관에 입사한 당신이라면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대기업 입사도 충분했을 것이다. 대기업에 비해 연봉이나 복지, 성과급 모두 뒤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나은 것을 찾으라면 ‘공적인 사명감’일 것이다.

 연애나 결혼 생활에서 사랑의 유효 기간은 3년이라는 말이 있듯 사명감도 유효 기간이 있다. 부디 여러분이 지치지 않길, 더 좋은 기회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어느 회사를 가든 연애하지 말고 썸만 타자.          



원숭이 실험과 MBTI     


 나는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좋은 편이다. MBTI를 좋아하기도 한다(맹신자는 아님). 평소에도 저 사람은 왜 저런 생각과 행동을 할까 속으로 궁금해하던 게 MBTI가 재유행하면서 재미있어졌다. 혹시 I 유형인 사람은 비판투성이인 이 책을 읽다가 ‘난 이 정도는 상관없을 것 같은데?’ 했던 분도 계셨을 것 같다. 사람 생각이 다 같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

 작년에 쓴 소설 『신의 직장. 신이 떠나다.』 7장에서 MBTI에 대한 사연이 나온다. 책을 다 써갈 무렵 대구의 한 기관에서 근무하는 지인과 오랜만에 만날 기회가 생겼다. 전에 노조 일을 하다가 알게 되어 친해진 사람인데 술자리에서 그분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

 MBTI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Y라는 팀장이 팀 업무분장을 하면서 IS××성향을 가진 S전임에게 잡일만 몰아줬다고 한다. 전화를 돌린다거나 단순히 자료 취합, 배포 수준의 티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어도 나눠서 해도 됐을 일인데 Y팀장은 굳이 S에게만 잡일을 배정했다. 어느 날 부서 회식을 하다가 다른 팀 직원이 Y에게 왜 S전임에게만 그렇게 배정했는지 너무 힘들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고 한다. 그런데 Y의 돌아온 대답이…


“아, 쟤 MBTI 성향이 그렇게 일 시켜도 되는 유형이더라고. 싫은 소리 못 내고 묵묵히 시키는 일 하는 성향이길래.”


 순간 회식 자리에 정적이 흘렀는데 Y는 아무렇지 않게 밥만 잘 먹었다고 한다. 일종의 소시오패스였다. 아무리 MBTI가 유행이더라도 알파벳 네 글자로 그 사람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영양제 겉에 쓰여 있는 문구는 크게 2가지다. 어디 어디에 ‘도움을 줌’ 또는 ‘도움을 줄 수 있음’. 전자는 확실한 효능이 있어 식약처가 인증한 것이고, 후자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거라고 했다. MBTI는 어디까지나 그 사람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 쪽일 뿐이다. 어쨌든 S의 사연이 모티브가 되어 막판에 부랴부랴 소설의 스토리를 추가하고 수정했었다.

 사실 그날 만난 지인이 S였다. S는 조용하긴 해도 일은 꼼꼼하게 잘하는 친구였다. 나랑은 다른 성향이라 예전에 내가 회사 흉을 실컷 볼 때도 그 친구에게선 싫은 말이 나오진 않았다. 실적 압박 같은 경쟁을 싫어했던 S는 공공기관에서 규정과 시스템대로 일하는 게 오히려 잘 맞는다고 했다.

 그렇다. 누군가는 제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많이 드러나진 않아도 이 사회가 돌아가는 데 분명 한몫하고 있는 분들이다. 나처럼 다 뜯어고치려는 사람만 많으면 그 세계도 꽤 골치 아플 것 같다. 선량하고 성실했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나도 8년이라는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

 공공기관에 잘 맞는 성향은 관리자형, 분석가형에 속하는 MBTI들이 잘 어울릴 것 같다. 현실적이고 헌신적이며 관리적 역량을 가진 분이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다. 학자나 연구자 성향이라면 대기업에서 신제품 개발하느라 압박에 쫓기는 것보다는 조용히 자기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정출연이 좋은 선택지다. 반면 성격이 급하거나 도전적인 성향은 공공기관의 시스템이 스트레스가 되고 울타리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공공기관에서 규정을 바꾸는 과정은 못해도 2~3개월이 소요된다. 누가 봐도 바꾸는 게 훨씬 좋은 일이라도 시스템 자체가 그렇다. 이사회, 운영위원회, 소관부처 설득 등 거칠 과정이 많다. 성격 급한 사람에겐 그만한 고문이 없을 것이다.

 또 기관은 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ENFP처럼 어딜 가든 방방 튀는 성향은 제지를 당할 수 있다.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체면이자 품위랄까. 아직 윗분들은 그런 걸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기존 시스템에서 조금 색다르게 해보고 싶다거나 효율적으로 무언가 바꾸려고 한다면 금방 저항에 부딪힌다. 문제 해결력이 좋거나 개성이 강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은 사람들을 설득하다가 지칠 수 있다.     

『화난 원숭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책에서 나오는 일화다. 실험자들은 한 우리 안에 원숭이들을 풀어 놓고 사다리 위에 바나나를 두었다. 원숭이들은 당연히 바나나를 먹기 위해 사다리를 올랐는데, 그때마다 천장에서 찬물이 쏟아지게 했다. 몇 번이고 시도하다가 어느새 원숭이들은 찬물이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바로 위에 바나나가 있는데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다른 신입 원숭이를 들여보내며 기존 원숭이를 한 마리씩 교체한다. 그 신입 원숭이 역시 원숭이답게 바나나에 달려들었는데 기존 원숭이들이 소리를 치고 위협하면서 신입을 말린다. 신입 원숭이가 사다리를 올랐다가는 자신들까지 찬물 세례를 받을 테니 신입을 말린 것이다.

 신입은 영문도 모른 채 사다리에 오르면 안 된다고 학습하게 된다. 그 무리의 단체 행동에 금방 물들고 바나나를 포기한 것이다. 실험자들은 이후에도 계속 한 마리씩 원숭이들을 교체했고 그때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모든 원숭이가 다른 개체로 바뀌었는데도 남은 원숭이들은 천장 위의 바나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유도 모른 채 그들은 ‘바나나는 먹으면 안 되는 대상’으로 받아들였다. 아마 어떤 원숭이가 왜 못하게 하는지 물어봤다면 ‘나도 몰라. 그냥 여기서 하는 방식이야.’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실험 내용을 교육기관이나 회사에서 한 번쯤 들어본 분들도 계실 것 같다. 이른바 ‘화난 원숭이 실험’으로 조직의 만성화된 부정적인 태도와 학습된 무기력증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실험이다.     


규정 때문에 안돼.

예산 없어서 안 돼.

다른 기관에서도 안 하는 거니까 안 돼.

선진국들도 안 해본 거니까 안 돼.

해봤는데 안 돼.

해본 적 없는 거니까 안 돼.

튀면 안 돼.

그냥 안돼.     


 회사에서 ‘안돼’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던 나에게는 공직사회가 이런 무기력증에 빠진 게 아닐지 생각한다. 좋은 제도와 시스템이 잘 갖춰졌다면 그것만 잘 지켜도 절반은 간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가 완벽하지 않듯 아무리 좋은 제도도 시간이 지나면 단점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단점을 파고들어 빈틈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갖춰진 제도를 잘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뻔히 문제가 보이는데도 고치려 하지 않는 건 나중에 생길 위기를 방치하는 것일 수 있다. 어느 시대든 지키는 사람도 필요하고 고치려는 사람도 필요했다.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다’며 시도하는 걸 겁내게 된 시대지만 언젠가는 공공기관이 조금 더 유연하고 말 뿐이 아닌 진짜 혁신을 선도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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