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취직, 출근 전 취소 통보를 받았다

100일 글쓰기 챌린지 - 33일차

by 혜봄

퇴사하고 나서 한동안은 다시는 마케팅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에 진절머리가 났었고, 내가 일했던 업종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다시 돌아가는 것에 회의감이 들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다시 일을 해야겠구나.’

이때까지만해도 선택권은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결심하면 쉽지는 않아도 다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와 연차가 발목을 잡았다.
나이와 연차가 너무 많아서 애매한 포지션. 마케팅 팀장 공고에 이력서를 닥치는 대로 넣어봤지만

면접 보러 오라는 곳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
뉴스에서 듣던 '경단녀',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내가 그 경단녀가 된 것이었다.


통장 잔고는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이제는 경력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려놓고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장, 생산직 같은 곳에도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연락이 없었다.
한 100군데는 넣어야 1~2군데 연락이 오는 수준.
그러다 어느 날, 한 식품 공장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래서 망설임 없이 갔다.

면접장에는 나보다 연배가 있어 보이는 중년 여성분들이 많았다.
인력 아웃소싱 담당자가 이력서를 나눠주고, 준비해온 증명사진을 붙이고, 보건증을 제출하라고 했다.
면접이라기보단 그냥 채용이었다.
총 8명이었고, 담당자는 내일부터 출근 가능한 사람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 가능한 사람을 조사했다. 그때부터 출근하면 된다고.

작업공간 CCTV를 보여주며 간단한 설명을 듣고 귀가했다.
“월요일 아침 8시 20분까지 늦지 마세요.”
담당자의 신신당부에 ‘일단, 뭐라도 일을 하게는 되었구나’ 싶었다.

어제, 금요일. '주말까지 푹 쉬고, 월요일부터 시작이네.
공장이건 뭐건, 가릴 때가 아니다.' 이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있을 무렵,
문자가 왔다.


“000님, 안타깝게도 저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셨습니다.”

???
월요일에 늦지 말라고 했던 그곳에서?
갑자기?

바로 답장을 보냈다.
“채용된 거 아니었나요?”
답변은 이랬다.
“그렇긴 한데, 귀하가 저희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대충은 감이 왔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어떤 부분이 맞지 않다는 건가요?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세요.”

그러자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력서 보니까… 너무 경력이 좋아서요.
저희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너무 괜찮아서 우리와는 안 맞아요.’ 그 말이었다.

나는 그저 사실대로 이력을 썼을 뿐이었다.
누구나 알만한 기업의 마케팅 팀장이었다는 것,
그게 그렇게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다.


순진했다.
공장에 취직하려면 경력을 일부러 낮추거나 지워야 했던 거다.
그래야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을 텐데.

결국 나는 내가 하던 일에는 나이와 연차가 많아서 안 되고,
그래서 눈을 낮춰, 뭐라도 할 수 있는 일에는 스펙이 너무 좋아서 안 된다는
그 사이 어디쯤에 끼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너무 웃기고, 너무 서럽고, 너무 씁쓸했다.
어디에도 나를 원하는 곳이 없는 기분.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어디까지 나를 내려놔야 겨우 한 자리 들어갈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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