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습작 #8. 대만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비행기 문이 열리자, 한국의 공기가 달랐다. 대만의 공기가 뜨겁고 묵직했다면, 한국의 공기는 얇고 단정했다.
내려앉은 비 냄새 속에서, 나는 여행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버스의 매연 냄새, 차선 위의 소음, 그 모든 익숙함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타이베이의 골목에서 들리던 스쿠터의 경적 소리와 비에 젖은 벽돌 냄새가 내 일상이었는데. 손에 쥔 여권보다 더 무거운 건 다시 시작해야 할 ‘일상’이었다.
다시 일하기 시작한 첫날, 창가에 앉아 흐린 하늘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반사된 내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대만에서 돌아온 지 겨우 일주일,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타이베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의 느릿한 리듬이 아직 내 걸음 속에 남아 있었다.
버스가 신호에 걸릴 때면 그 순간만큼은 마치 기륭의 항구에 멈춰 선 듯했다.
바람의 냄새도, 창가에 부딪히는 빗방울의 결도, 모두 대만의 기억과 닮아 있었다.
그 짧은 정차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여행 중이었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 작은 카페.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커피 향이 퍼지는 공기 속에서 나는 문득 춘수당을 떠올린다.
메인역 근처, 오후의 빗소리, 그리고 바닐라 향이 살짝 섞인 밀크티.
그때의 나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단 한 모금으로 하루를 채웠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커피를 마시지만, 그 맛 안에 여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다 보면 그때의 공기, 그때의 향, 그때의 내가 서서히 되살아난다.
여행의 여운은 이렇게 사소한 순간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 불빛이 비에 젖은 도로 위로 반사되어 도시 전체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조용히 이어폰을 끼고 대만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들었던 노래를 틀었다.
창밖을 스치는 불빛들이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길가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빗속을 달리는 차들의 속도도, 모두 하나의 긴 여행처럼 이어졌다.
‘여행이 끝났다고 해서, 정말 끝난 걸까?’ 그때 깨달았다.
여행은 돌아온 이후에도 내 삶의 곳곳에서 다시 피어난다는 걸.
집으로 돌아오면 가끔 대만에서 샀던 작은 엽서를 꺼내 본다.
기륭의 항구, 타이베이 101, 그리고 친구들과 찍은 웃는 얼굴들.
사진 속 나는 조금 다른 사람 같다.
조급하지 않고,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으며, 그저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는 얼굴.
그때의 나를 지금의 내가 바라본다.
그 얼굴을 잊지 않으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책상 위 노트에는 이런 문장들이 하나씩 남는다.
“오늘의 커피 향은 타이베이의 오후를 닮았다.”
“출근길의 바람은 기륭의 파도처럼 부드럽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여행이 나를 바꾼 게 아니라, 여행이 나를 ‘보이게’ 했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지쳐서 늦게 집에 들어오고, 주말이면 빨래를 돌리고, 밥을 짓는다.
그 평범한 하루들이 이젠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 속에 스며든 순간의 향, 그때의 바람, 그때의 웃음이 지금의 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여행은 떠남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이었다.
대만의 골목에서, 커피 잔 위의 김 속에서, 그리고 오늘의 일상 속에서 —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