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서 일 거야

여행의습작 #10. 닫혀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하루의 기록

by 미나래

여행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비엔티엔에서 베트남으로 넘어가던 슬리핑버스말할 것이다.

그날, 나는 세상의 모든 피로와 분노를 한몸에 지고 있었다.

더위와 냄새, 좁은 공간, 낯선 시선들 —
무엇보다 ‘이방인’으로 대우받는다는 기분이 나를 견디기 어렵게 했다.

버스 기사는 우리의 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외국인이라며 가장 좁고 불편한 뒷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한국에 돌아가면 민원이라도 넣고 말겠어’ 하며 이를 악물었다.
아이들도 내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앉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차창 밖은 어둑해지고, 버스는 국경을 향해 덜컹거렸다.
서늘한 밤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지만 내 안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불편함은 오해를 부르고, 그 오해는 곧 ‘모두가 나를 속일 거야’라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을 닫아버린 사람이었다.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거칠었다.
“엄마가 이렇게 욕을 잘하는 줄 몰랐어요.” 률이의 말에, 나는 그제야 스스로가 낯설었다.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던 나는 그날 분노에 잠식된 욕쟁이 아줌마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분명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국경을 넘고 나서 잠시 정차했을 때, 한 청년이 껀군에게 자리를 양보해줬다.

껀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청년은 장난스럽게 간지럼을 태우며 웃게 만들었다.
또 다른 남자는 내게 손짓하며 조금 더 편한 자리를 가리켰다.
그들의 표정은 말보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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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미로 얼굴이 창백해진 청년에게 나는 무심코 가방 속 페퍼민트를 내밀었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향을 맡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하나에 굳게 닫혀 있던 내 마음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휴게소에 내렸을 때, 그 청년은 노트북과 지갑이 든 가방을 내게 맡겼다.
“잠깐, 부탁해요.” 그의 믿음이 낯설었다.
‘이걸 나한테 왜 맡겨?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나를 도둑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들을 도둑으로 몰고 있었다.

버스는 여전히 덜컹거렸지만, 내 마음의 소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창밖의 별빛이 낯선 하늘 위에서 반짝였다.
그날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세상은 내 불안만큼 차갑지 않다는 걸.

그리고 불친절하게만 보이던 그들의 무표정 뒤에는 언어보다 깊은 다정함이 있었다는 걸.

아이들은 그날을 “힘들지만 재밌었어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 여정을 ‘불쾌한 기억’으로만 남겼다.
지금 돌아보면, 어쩌면 그건 그들이 아니라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나는 여행지에서 마주한 낯선 친절에 의심보다 감사로 먼저 반응하려고 한다.

이방인에게도, 나에게도, 조금 더 따뜻해지기 위해서.

그날의 버스는 불편함으로 가득 찬 여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보니 그건 나를 성장시킨 가장 긴 여정의 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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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엔 → 베트남 국경, 슬리핑버스 안에서
“진짜 벽은 언어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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