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천천히 살아가는 법

방비엥의 여유에서 비엔티안의 현실까지

by 미나래


라오스, 천천히 살아가는 법

방비엥의 마지막 날 아침, 창문을 열자 짙은 안개가 산 위로 천천히 걷혔다.
며칠 동안 머물렀던 이 마을의 공기엔 묘한 정겨움이 배어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물놀이를 하며 깔깔거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참 좋을 텐데.’

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움직임과 긴장의 연속이다.

머물렀던 공간의 온기를 뒤로한 채, 우린 다시 배낭을 메고 비엔티안으로 향했다.


VIP 버스의 진실

20170611_092755.jpg?type=w966
20170611_092808.jpg?type=w3840

비가 내리던 아침, 우리는 터미널에서 ‘VIP버스’를 기다렸다.

표를 끊을 때 직원은 물었다.
“미니밴으로 할래요? VIP로 할래요?”
‘이왕이면 좋은 게 좋지.’
나는 주저 없이 VIP를 골랐다.

하지만 도착한 버스는 오래된 15인승 밴이었다.

기사에게 물었다.
“이게 VIP버스예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라오스에서는 이게 VIP야.”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VIP라는 단어조차, 이 나라에서는 느긋했다.
시간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사람이 다 차야 출발하는 버스, 좌석이 가득 차면 비로소 시동이 걸린다.

출발 예정 시간은 오전 10시.

하지만 버스는 10시 반이 되어서야 천천히 움직였다.
누군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내리고, 기사도 하품을 하며 담배를 피웠다.
라오스의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사람의 리듬으로 흘러간다.

IMG_20170611_122851_691.jpg?type=w3840


비엔티안의 첫인상

4시간의 느린 달림 끝에 도착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도시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웠다.
방비엥의 산과 강 대신, 이곳엔 매연과 사람들의 재촉이 가득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뚝뚝이 운전사들이 몰려왔다.

“숙소까지 얼마예요?”
“8만 낍!”
“비싸요, 4만 낍.”
흥정이 오갔다. 결국 4만 낍에 손을 잡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 지갑엔 5만 낍뿐이었다.
“거스름돈 주세요.”

“없어요.”
기사의 웃음은 능숙했다.

그 순간, 나는 라오스의 진짜 법칙을 깨달았다.

이곳에선 흥정보다 양보가 빠르고, 논리보다 체념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체념 속엔 묘한 평화가 있었다.

숙소 주인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라오스에선 그런 일 흔해요.

여기선 급할 거 없어요. 그냥 웃어요.”

그날 나는,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20170611_154651.jpg?type=w966



느림의 도시에서 배운 것들

다음 날 아침, 우린 비엔티안의 길을 익히기 위해 천천히 걸었다.

기온은 높았고, 공기는 무겁고, 걷는 것조차 일이 되어버렸다.
그제야 왜 이곳 사람들이 그렇게 뚝뚝이를 이용하는지 알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부터 흥정에 밀리지 않겠어.”
주머니에 3만 낍만 넣고 다니며, 모든 뚝뚝이 기사에게 똑같이 말했다.
“3만 낍! 그 이상은 안 돼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흥정이 성공할 때마다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그들에게 3만 낍은, 아마 우리의 천 원보다도 더 소중한 돈일 것이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여행에서 내가 싸우고 있었던 건 가격이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려는, 어쩌면 불필요한 방어였다.

20170611_160229.jpg?type=w3840


껀군의 이발소

그날 오후, 껀군은 더위에 지쳐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엄마, 한국 돌아가면 바로 머리 자를 거예요.”
그러다 숙소 근처의 허름한 이발소를 보고 멈췄다.
문 위엔 바랜 상장과 오래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자를까?” 껀은 더벅 머리가 너무 더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여니 작고 단단한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손엔 오래된 가위가 들려 있었고, 자를 때마다 쇳소리가 울렸다.
껀군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눈빛엔 묘한 신뢰가 스며 있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작은 벽장의 자물쇠를 열었다.
안에서 바리깡과 드라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것들을 꺼내고, 또 조심스레 다시 넣었다.
한 올 한 올 다듬는 손끝엔 세월이 묻어 있었다.

“3만 낍.”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라오스에서 제일 멋진 머리예요.”

껀군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시원하고 좋아요.”
아들의 웃음엔 비엔티안의 더위보다 더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20170611_185212.jpg?type=w3840

밤이 되어 숙소 앞에 앉았다.
률이는 멀리서 지나가는 송태우를 세우고,
껀군은 가벼워진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라오스의 느림은 처음엔 답답했지만, 이제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시간은 여전히 느리게 흘렀지만, 그 느림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느꼈다.

20170612_135112.jpg?type=w3840
“라오스에서 배운 건 단 하나.
급할 것도, 완벽할 것도 없다.
그저 천천히 살아가면 된다.”



라오스 비엔티안, 어느 늦은 저녁에
시간은 느렸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깊어졌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라오스 방비엥, 머무름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