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작별과 새로운 시작 – 정훈, 30년의 차와 이별하다
2044년 어느 맑고 바람 좋은 봄날, 속초 리조트의 창고 한쪽.
정훈은 먼지 덮인 덮개를 천천히 걷어올리며,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 아래에는 은색도 아닌 회색도 아닌, 시간 속에 빛이 바랜 오래된 차 한 대가 있었다.
그가 30년 전, 첫 월급을 모아 부모님의 도움 없이 직접 구입한 중고차였다.
작고 투박했지만, 그에게 자유와 책임, 그리고 꿈을 처음 실어 나른 동반자였다.
모든 길을 함께 달린 차
정훈은 차 앞에 선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처음’들이 담겨 있었다.
첫 출근 아침, 긴장과 설렘을 삼키며 이 운전대에 손을 얹었던 기억.
서연을 업고 병원 응급실에서 돌아오던 날 느꼈던 핸들의 감각.
리치와 함께 떠났던 첫 강릉 여행에서 창문 너머 바다를 보며 웃던 은주의 옆모습.
지금은 도장이 벗겨졌고, 운전대 가죽은 손때로 닳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 안엔 인간적인 시간, ‘살아온’ 날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정훈은 조용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젠 보내줘야 할 때구나…”
그는 키를 천천히 쥐고, 운전석에 마지막으로 앉아 핸들을 매만졌다.
“30년 동안… 정말 고마웠다.
내 성공의 시작은 너였고, 내 겸손의 끝도 너였어.”
그는 차를 복원해 리치재단 박물관에 기증했다.
차는 유리 전시관 한가운데, 조명을 받아 반투명하게 빛났다.
옆에는 정훈의 손글씨가 새겨진 작은 명패가 놓였다.
“한 사람의 성공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그 문장은, 박물관을 찾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사진 속에서 마치 출발선처럼 남았다.
며칠 후, 정훈은 은주와 함께 서울의 한 자동차 전시장에 들어섰다.
눈에 띄게 조용하고 고요한 공간.
그는 한 대의 차 앞에서 멈췄다.
그가 고른 차는 오직 하나였다.
디자인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삶의 디테일이 새겨져 있었다.
리치와 럭키의 자수는 뒷좌석 헤드레스트에 정교하게 박혀 있었고, 서연이 유년 시절 직접 쓴 손글씨,
“우리 아빠는 진짜 멋져요!” 는 대시보드 아래에 금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외장은 흰색과 금색이 섞인, 디자이너가 ‘희망의 여백’이라 이름 붙인 컬러였다.
판매 담당자가 물었다.
“이 차를 누구를 위해 구입하시는 건가요?”
정훈은 미소 지으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저를 위해요.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를 위해 뭔가를 해보려고요.
이제는 저도… 저를 조금은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됐거든요.”
은주는 그 옆에서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당신은 모두를 위해 달렸어요.
이제는, 자신을 위한 속도도 괜찮은 거예요.”
새 차의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전면 유리 너머, 리조트 해안선을 따라 바다가 수평선까지 펼쳐졌다.
정훈은 한 손으로 스티어링을 가볍게 쥐고,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30년 전엔, 이 길이 얼마나 먼지도 몰랐지…
그런데 지금은 알아.
진짜 긴 여정은, 내가 나를 이해하는 길이었단 걸.”
햇살은 천천히 차체를 감싸고, 그의 삶은 또 하나의 고요한 전환점을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