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정책, 소수자 배려 개념 합의가 먼저다
아프간은 비극적이지만 일단 패망했다.
최후까지 싸우자는 아프간인들도 있지만, 해외로 망명하려는 아프간인들도 있다.
우리에게도 난민 문제는 현실이다.
진지하게 논해봐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논한다'라는 것은 지성의 영역이어야 한다. '논하다'가 감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면 논란과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
(논하기 위한 동력은 감성이어도 좋다.)
하지만 지 혼자 착한 척하면서 의미 없는 논란과 갈등을 우려하는 이들을 못된 사람 만드는 거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정의당 장혜영 같은 경우다.
내가 장담컨대, 장혜영의 방식과 지성을 따를 때마다 우리 사회에는 의미 없는 논란과 갈등이 늘어난다.
지금도 논란과 갈등은 충분하다.
그 공감 못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이후에 따르는 문제들을 걱정할 뿐이다.
"왜 논란과 갈등이 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통해, 그에 맞는 해결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나이브한 모습들을 정말 싫어한다.
'무조건적인 이해'만 요구하고 '사회적 갈등 비용'은 남탓하며 딴청 부리며 착한 척한다.
제발 그거 이제 그만하자.
이건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감성으로 지성+감성 허영을 느끼려는 무책임한 게으름이다.
아프간 난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맹목적 PC주의적 스탠스가 아니라 약간의 지성의 영역으로 논함에 대한 글이다.
오늘 아침 스타벅스 화장실 물론 남자 화장실이다. 그곳에서의 몇 장면이다. 화장실 선반 위 공간에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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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부터 이어진다.
언젠가부터 무조건적인 이해가 선함으로 받아들이라는 사회적 강요가 있는데, 그럴 필요 전혀 없다.
위 글에서 여러 방문객분께서 할랄 푸드 급식에 대한 질문을 주셨고, 따로 정리해볼 거라 약속을 했었다.
왜 난민 문제, 소수자 문제가 자꾸 논란이 되고 갈등이 되는가?
이 고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고민을 하지 않으면 논란과 갈등이 늘어날 것은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그런데 그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이해하고 공감 못하면 못된 사람 취급한다.
논란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문화에 대한 개념과 소수자에 대한 개념조차 잡지 않고 사회적 합의하려는 노력도 안 했다.
각자가 생각하는 개념이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논란은 모든 부분, 모든 층위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슬람 종교를 믿는 것을 존중한다.
vs
한국의 법과 시스템 무시하고 이슬람화한다.
개념 정의가 되지 않았을 때의 생각의 편차다.
이 개념 정의가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우리는 이미 유럽에서 충분히 확인했다.
관용과 인권을 외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꼈던 유럽은,
이 때문에 엄청난 갈등이 벌어졌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익이 득세하고, 다문화고 뭐고 문명 충돌 양상으로 번진다.
이게 게으름의 대가다.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잠깐 가려져 있지만 여전히 지속 중이고, 이들 때문에 극우 꼴통들이 대통령이, 총리가 된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이유 중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PC주의에 대한 피로감이었다.)
자, 이제 예견되는 결과는 풍부한 케이스스터디를 통해 알게 됐다.
한국의 무슬림들은 어떤가?
아직 숫자가 적을뿐, 한국에 융화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속에 이슬람화를 고수한다.
한국의 법과 시스템을 벗어나려 한다.
다문화 사회의 목적은 한국의 문화, 법, 시스템 속에서 함께 어울려사는 사회다.
한국 문화, 법, 시스템에 예외가 되는 다문화가 아니다.
그렇기에 다문화 사회의 개념은 이렇게 정의돼야 한다.
다문화 사회의 개념
한국의 문화/법/시스템 내에서 다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그 영역 밖의 문제는 각자의 선택이기에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개념을 정의하면 명확해지고,
시민들과의 사회적 합의도 어렵지 않아서 갈등도 해결되고,
앞으로 정책을 만들 때 방향성에 태우면 되니 오락가락하지 않게 되고,
사회적 합의를 하고 다문화 사회의 방향성을 공유했으니 불확실성의 공포가 사라진다.
이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정의'의 핵심은 "종교는 한국에서 문화/법/시스템보다 한참 하위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다.
이 개념 정의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문화가 충돌한다.
안타깝지만 여기는 한국이다.
그들이 한국에 온 것은 어찌 됐든 그들의 선택이다.
다문화 시대고 뭐고, 한국에서는 한국의 문화가, 법이, 시스템이 더 존중받아야 한다.
한국인들도 그 존중을 받을 때 난민과 다문화를 존중하고 포용한다.
그들이 이기적이면 한국 사람들도 이기적이 되는 것은 섭리다.
이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선을 넘으려는 이들에게는 기준 이상의 페널티도 존재해야, 다문화 정책도 존중받을 수 있다.
언제부터 대림동에서는 회칼 들고 다니면서 씅질 나면 휘두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디폴트 문화가 됐냐?
이것도 이해해줘야 하는 그들만의 문화인가?
여긴 한국이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다시 한번 아래의 사례와 코멘트를 읽어보자.
분명히 다르게 읽힐 것이다.
그들의 선택으로 할랄이 아닌 급식을 거부할 거라면, 부모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할랄 도시락을 싸주면 된다.
아니면 무조건적인 다문화를 지지하는 시민단체가 자금을 모아서 할랄 도시락 사업을 해서 전국의 학교에 무슬림 수만큼 할랄 도시락을 매일 점심 배송하면 해결될 문제다.
이 요구를 한국의 법과 시스템, 한국인들에게 당연한 것처럼 권리나 이해를 요구하지 말자.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을 했다면 선택한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노력이다.
이런 개념 정의 없이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니, 극소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칭찬을 받지 못한다.
무조건 좋은 사람이 되고파 감성으로 '논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논란과 갈등이다.
의미가 없는 논란이고, 필요가 없는 갈등이다.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다른 사회적 갈등 문제들도 마찬가지다.
소수자 문제도, 젠더 문제도, 양심적 병역 거부도, 모럴 해저드 문제도, 기레기 문제도, 투기 문제도,
일단 개념 정의를 하고 사회적 합의 이후 방향성과 로드맵을 설정하고 진행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갈등이 생겼다면 풀어내야 한다.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어렵다고 방치하면 너무 많은 갈등이 혼재하게 되고, 혐오 사회가 됐다.
내가 장혜영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다.
갈등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포지션의 사람이, 끊임없이 의미 없는 갈등을 만들어낸다.
쌔끈한 감성 단어로 스스로 포장만 하고 남탓하며 가르치려 든다.
뭘 주장하기 전에, 개념을 정의하고 선을 분명하게 하고 사회적 합의를 얻어라.
주장은 그 다음이다.
한국에 와서 한국을 존중하면 충분히 더 존중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