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한 역사여행
2019년 12월 31일, 이번 가족 여행지는 상하이(上海)이다. 여행을 앞두고, 내가 마지막으로 상하이를 갔던 게 벌써 20년이나 흘렀음을 알았다. 중국에서 공부하면서 상하이는 내가 살던 도시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제공항이 있는 대도시였고, 중국어 능력시험을 치기 위해 방문한 도시 난징(南京)에서도 가까워 시험이 끝나면 들러 도시의 공기를 마시던 곳이다. 그곳은 내가 생활했던 시골 도시와 달리 높은 건물들이 즐비했고, 길거리도 깨끗했으며(당시 중국인들은 길에 침을 뱉거나 해바라기씨를 이빨로 발라 먹고 껍질을 길에 뱉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절이었다), 유럽의 모습이 남아있는 반짝이는 와이탄의 야경은 탄성을 지르게 하는 설레임이 있었다. 비행기 아래로 보이는 상하이를 보면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진부한 말을 떠올린다. 문득 정말 강산이 변하는 건지, 강산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강산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변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해외 여행을 하면서 그 지역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내 말을 편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건 큰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평소에 중국어를 사용할 일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아직 여행을 다니는 데는 부담이 없다. 덕분에 남편은 이번 여행이 세상 편했다고 한다. 공항에서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서 걷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나의 눈은 그들을 살피느라 바빴고, 나의 기억은 어느새 20년 전의 시간을 더듬어본다. 그때 그 시절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빠르게 발전했다. 호텔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시내 거리에는 에어로빅, 검무, 우슈와 같은 아침 운동을 하는 중국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골목마다 주택 베란다에 가득 널려져 있는 빨래를 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 시절 아침 식사로 시장이나 길거리 노점에서 사먹던 요우티아오(油条,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 소금으로 간을 하고 길쭉한 모양으로 기름에 튀긴 음식)를 맥도날드 아침 메뉴로 사먹는 건 작은 놀라움이었고, 우리 돈 50원이면 사 먹던 요우티아오가 1,200원이나 하는 것도 변화의 시간을 실감하게 했다. 그래 지나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림책 <백년아이>는 1919년에 태어난 아이가 겪어온 한국의 100년을 역사의 장면으로 보여준다. 검은색 판화로 표현한 장면, 장면들은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지난 역사의 존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년 전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듯 친구들과 의무감으로 방문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나는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아이는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백범일지>의 내용을 부분 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와 함께 전시실을 둘러보며 임시정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이야기를 비롯해 전시물을 보면서 당시의 상황을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의미 있었다. 삶의 시간이 바뀔 때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다른 생각과 느낌을 줄 수 있듯이, 특정 장소 또한 그러할 수 있음을 새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위해, 정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불꽃이 되어 버린 사람들을 알수록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그들의 삶 덕분이구나 싶어 숙연해집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나와 루쉰공원(구. 홍구공원)에 위치한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최근에도 여러 단체에서 기념관을 많이 방문하는지 동상 앞에는 헌화된 하얀 국화꽃이 가득했다. 한 시간 밖에 소용 없는 자신의 시계를 김구 선생과 교환했다는 윤봉길 의사의 유명한 이야기에 괜히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시된 수통 폭탄, 도시락 폭탄, 김구 선생과 교환했던 시계를 보면서 감히 그 날의 시간도 짐작해본다. 작은 기념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물은 그 날의 기록들을 보여주는데, 아이는 괜히 무서운 지 그만 나가고 싶다고 했다. 기념관을 나서면서 중국의 대문호 루쉰 동상이 있는 곳도 들렀다. 중국의 소설가이면서 혁명가였던 루쉰의 동상과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지가 않다.
“백 년이란 긴 시간을 지나 지금 이곳까지 왔어.
민주야, 이젠 네가 걸어가야 해.” (할아버지가 증손녀에게)
상하이에는 아이가 좋아할만한 장소가 참 많이 있었다. 아이는 이번 여행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디즈니랜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올해 삼일절이 오기 전에 가족이 함께 그림책 <백년아이>를 다시 펼쳐보려고 한다. 그리고 삼일절에는 함께 태극기를 걸어야겠다. 지난 백 년을 기억하고, 앞으로의 백 년을 응원하면서.
2020.01.10. 일상을 여행하는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