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좋은날 Sep 16. 2020

[독서일기]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김원희

지팡이 대신 캐리어를 끕니다

내가 내 인생을 멋지게 충만하게 살아야 한다. 자식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진 내 환경에 맞추어 즐기며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을 즐기는 것을 아이들이 보고 "내 어머니 아버지는 충분히 인생을 즐기고 가셨어. 어머니 아버지의 인생은 참 괜찮았어" 할 수 있도록.


지난 주 독서일기 모임에서 봄단장님이 책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소개해주었다. '인생은 붙잡고 있는 것과 놓아주는 것의 균형잡기(루미)'라는 문구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마주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내려놓음이 아닐까. 아이들이 태어날 때 부모가 아이와 만나기 위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차근차근 하듯이, 죽음에도 담담하게 이별을 잘 해내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제 40대 초반, 아직 젊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시간이 죽음의 시간에 더 가까워져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어떻게 나이들어 가야하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물음이 요즘 내 안에 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 제목이 좋다. '할머니, 지팡이 대신 캐리어를 끕니다'라는 문장은 더 좋다.


70대 부산 할매, 할매는 당연히 여기 저기 몸이 아파 캐리어 한 가득 약을 챙겨야 하지만, 여전히 영화나 책의 배경이 되었던 곳을 직접 마주해보고 싶어 두 발로 여행을 떠난다. 직접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하고, 때론 길을 잘못 찾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한참을 걷기도 했다는 모습에 자연스레 나의 여행 준비 모습들을 대입해본다. 할매는 정해진 시간에 여러 나라를 스치듯이 지나치는 여행보다는 한 나라를 진득하게 둘러보는 여행이 좋다고 했다.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이 끌리고, 궁금한 마음이 생기는 건 그동안 할매가 살아온 모습과의 차이로 인한 자연스러움이지 않을까. 오~ 나도 할매처럼 한쪽 어깨에는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을, 또 다른 어깨에는 무대포 정신의 용기를 장착하고 자유롭게 여행다니는 멋진 할매가 될 수 있을까? 몹시, 아주 몹시 그러고 싶다.  


자유여행을 다니면 언어 소통이 잘 안되거나 구글 지도를 잘못 봐서 길을 헤매는 건 너무나 빠질 수 없는 경험이다. 열차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독일을 여행하면서 소도시 뉘른베르크에서 더 작은 마을 찌른도르프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어떻게 사야하는 지 몰라 기계와 한참을 씨름하다가 현지인에게, 또 다시 역무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기차표를 출력하기까지 1시간 가까이 시간을 소비한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그 역에는 오로지 기계로만 티켓을 살 수 있었고, 역무원도 기차표 구매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호텔을 예약할 때 숙소 정보에 미니바가 있어 친구와 와인 한 잔 마시면서 기분을 내보려고 미니바를 한참 찾았는데, 그게 책상 아래에 있는 작은 냉장고임을 알았을 때의 허탈함, 체크아웃을 하기 위해 짐을 챙겨 숙소키를 반납했더니 호텔 프런트 직원이 "Tomorrow", "Tomorrow" 라고 했고, 그 호텔 직원이 아니었으면 하루 일찍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갈 뻔했다는 할매의 에피소드에 마치 내 일인양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물론 할매는 진땀 났겠지만 딸 아이에게 얘기해주니 우리의 여행 에피소드를 떠올렸는지 굉장히 재미있어 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없냐고 묻는데 할매한테 살짝 미안해졌다. 여러 황당한 에피소드로 그 여행을 기억하게 되는 건 분명 자유로운 여행의 시간이 가진 매력이다.


그래서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 책 속의 작은 공간 하나, 책 속에 묘사되어 그곳의 하늘과 땅, 식당, 기차역, 사람들, 은밀한 사랑과 모험, 그곳은 어떨까? 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그곳을 동경하고 그곳으로 떠나는 꿈을 꾼다. 지친 삶을 위로해해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어느 시간 그곳에 내가 있을 때의 환희. 지금, 나는 건지섬, 환희의 순간에 있다.


우리 가족은 책과 여행을 좋아한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책을 읽고 여행을 준비하고, 두 발로 여행을 다니면서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해도 우리의 여행은 즐겁다. 뭐를 그렇게 아끼겠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라 많이 걸을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족 여행의 시간은 다음 여행을 계획하게 한다. 지금은 셋이서 함께 여행을 다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 여행길에 남편과 나, 둘이 남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서도 지금처럼 두 손 꼭 잡고 유럽의 돌바닥을 하염없이 걸어다니고 싶다. 돌바닥에 걸터 앉아 달콤한 젤라또를 먹으면서 남편은 또 물어오겠지. 다음 휴가엔 어디로 여행갈까? 하고. 그래, 인생 뭐 있나? 두 다리 튼튼할 때 많이 다녀야지. 할매의 버킷리스트는 남편과 함께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데, 나도 언젠가 걸어보고 싶었던 그 길을, 버킷리스트에 담아야할까?




2020.09.16. 어른이 되어가는 S

매거진의 이전글 [독서일기] 잘츠부르크, 박종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