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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날 Sep 26. 2020

[사소한 일상] 바람이 분다

바람이 좋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좋다. 하늘과 자꾸 눈이 마주치게 되는 요즘이다. 오늘처럼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히는 작은 바람이 불어오는 날, 높은 하늘에 펼쳐친 구름은 모래사장의 고운 모래를 흩뿌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잔잔한 물결이 이는 강물 같기도 하다. 오늘도 사무실에서 나의 마음은 넘어지고, 상처받고, 다시 털고 일어나 보니 나는 퇴근길 운전대를 잡고 있다. 빨간 신호등에 멈춰설 때마다 가만히 저녁 하늘을 바라본다. 볼이 빠알간 저녁 노을이 강물에 어린다.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다.


지난 주말, 바람이 너무 좋아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오~ 바람 좋다.", "아~ 바람이 너~무 좋다."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가만 생각해보니 바람이 좋다고 느껴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바람이 정말 좋다. 전망이 좋은 높은 층에 살고 있어 거실의 창을 통해 매일 풍경화를 감상한다고 생각했다. 커다란 액자를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시시때때로 그림의 모습이 살아 움직인다. 오랜만에 공원에 나온 아이가 쨍한 햇볕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손으로 움켜지며 나뭇잎이 사라지는 마술놀이를 한다. 가을날 바짝 마른 낙엽을 밟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오늘은 손으로 그 촉감을 느껴본다. 나뭇잎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바삭한 감자칩을 먹는 것 같은 소리가 나는데, 그것을 발로 두드리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주워 담는다. 작은 돗자리에 앉아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 없이 좋다. 눈부신 햇살은 적당하게 따스하고, 공원을 가득 채운 초록 나무들 사이에 앉아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하늘도, 나무도, 뛰어노는 아이도, 작은 내 시야의 프레임에 담아보는 장면, 장면이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풍경화보다 더 생동감 있어 오감이 움직이는 듯 하다.


여행을 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그 시간이 그리운 이유가 일상안에서 문득문득 떠오른다. 여행이 많이 가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수 많은 부정적인 뉴스에서 귀를 닫아버리고 싶고, 온갖 걱정거리를 잊어버리고 싶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고, 점점 조여오는 나의 숨통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고 싶고, 다친 나의 마음에게 밴드를 처방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눈부신 태양을 양산 삼아 유럽의 거리를 한 없이 걸었던 시간, 다리는 무거워지지만, 마음은 가벼워지는 상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지금의 나에게 몹시도 필요하다. 계획대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반 고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괜찮았을까?


바람이 분다. 건조해진 나의 마음에도.

바람이 분다. 딱딱한 나의 일상에도.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2020.09.25. 어른이 되어가는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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