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라(1954) / 혼다 이시로
전쟁과 평화는 정반대의 개념이면서도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떼어놓을 수가 없다. '무력에 의한 평화'가 그리 달콤한 말은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평화로운 시대가 압도적인 무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일이 대부분이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남북관계의 해결 방안을 두고 한미동맹과 군비 증강에 의한 압도적인 무력을 갖출 것인지, 총칼을 거두고 대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반대의 의견이지만 두 논리가 모두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평화'이다.
일본의 전후세대도 일본 제국의 패망을 뒤로하고 앞으로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시각이 분분하였다. 파시즘의 부활까지는 아니더라도, 서구 열강을 능가하는 무력을 다시 갖추어 국제사회의 패자에 도전하자는 호전적인 시각과 더 이상의 무력은 거두고 일본의 경제와 문화 발전에 힘쓰자는 시각의 대립이다. 그리고 1954년 일본은 '고질라'라는 가상의 괴물을 창조하여 두 가지 시각을 복합적으로 표현하였다.(원래 이름은 '고지라'지만 알파벳 표기로 인해 지금은 '고질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고질라는 수폭 실험의 영향으로 방사능이 축적되어 깨어났다고 설정되어 있다. 곧 고질라는 인간의 무분별한 무기 개발의 부작용으로 탄생한 괴물이며 그 부작용이 결국 일본인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어떠한 무기로도 죽일 수 없는 고질라는 인류의 천적과도 같은 존재로, 연구하기에 따라 일본이 갖출 수도 있는 '궁극의 무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고질라의 상징성을 두고 영화는 일본의 구세대(야마네 박사, 국회의원)와 신세대(오가타, 세리자와) 간의 극명한 시각차를 연출한다.
국회의원은 고질라가 수폭의 부작용으로 인해 탄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은폐하길 원하며, 야마네 박사는 고질라를 죽이지 말고 연구할 것을 주장한다. 영화 시나리오 상으로는 야마네 박사가 고생물학자이기 때문에 고질라의 불가사의한 생명력과 힘에 대한 호기심이 그 원인이라고 설정하고 있으나, 사실 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압도적인 군사력'에 대한 구세대의 동경이다.
반면 오가타와 세리자와로 대표되는 신세대는 인간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고질라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세리자와는 태평양전쟁으로 한쪽 눈을 잃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고질라를 죽일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으면서도 이를 파괴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끝까지 고뇌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무력을 더 큰 무력으로 파괴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기를 개발할 기술력으로, 인류는 파괴가 아닌 더 나은 목적을 위해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세리자와로 표현된 이 두 가지 가치관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야마네 박사의 마지막 깨달음 한 마디를 통해 영화를 관람하는 모든 인류에 대한 경고를 띄우며 마무리된다.
그 고질라가 마지막 한마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만약 수폭 실험이 계속해서 행해진다면... 그 고지라와 같은 부류가 또다시 세계의 어딘가에 나타날지도 몰라.
영화의 메시지처럼 오늘날 또 한 마리의 고질라가 지속적인 핵실험을 통해 북한 땅에 나타나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질라를 상대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모두가 관심을 갖고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평점 ★★★★
Reviewed by lk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