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의 크리스마스 / 오시마 나기사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다. 모두들 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각각의 민족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가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민족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기도 한다. 민족들이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생각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서로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게끔 만드는 것일까?
명확한 대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재미있는 것은, 민족의 사상적 방향은 정해져 있더라도 그 구성원 모두가 완벽하게 그곳을 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한 민족끼리도 싸움을 그치지 않는다. 국가 간의 전쟁이란, 서로의 생각의 차이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며 그 결과로 수많은 '생각'들이 억압받고 소멸하게 된다. 그렇다면 '민족의 생각'이 낳은 전쟁에서, '개별적인 생각'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수십만이 생각들이 부딪히는 전장에서, 그 개별적인 단위들은 어떻게 전쟁에 임하고 있는가? 1983년작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에서는 폭력을 상징하는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라는 두 심벌을 통해 생각의 차이에 대한 하나의 해법을 풀어나간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인 1942년, 일본군에서는 연합군의 포로들로 개별 부대를 두고 노동을 시키면서도 포로들을 통솔하는 지휘관을 포로들 중에서 임명하는 등,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나름의 인격적인 존중을 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포로가 아니라 평화적인 이주민이라 하더라도 황백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든 법이다.
영화의 중심인물은 포로수용소의 소장인 요노이 대위와 그 부하인 하라 상사, 연합군의 포로인 로렌스 중령과 포로들의 지휘관 척크리스, 그리고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셀리어스 소령이다. 영화는 로렌스 중령의 중립적인 입장에서 요노이 대위와 셀리어스 소령의 갈등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으로 진행된다. 생명보다도 신념과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전형적인 일본의 군인 요노이와 전장이지만 인간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서양인 셀리어스의 갈등은 곧 동서양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측면도 있다.
천재적인 작곡가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력 또한 놀라웠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연기한 요노이 대위는 누구보다도 제국에 대한 충성이 앞서고 제국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는 전형적인 군인이며 오로지 자신의 길 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셀리어스를 보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거부감일까? 호감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과 너무나 다른 방향의 신념을 품고 있는 그에게 요노이 대위는 점점 빠져들어간다.(요노이와 셀리어스의 호감을 동성애적 코드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분명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두 남자가 서로의 신념을 이해하고 매료되는 감정의 변화가 얼핏 애정의 표현으로 비칠 수 있도록 연출된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누구도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요노이는 셀리어스가 마음에 들고, 셀리어스도 요노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둘의 갈등은 깊어가기만 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갈등의 핵심이 되는 것은 바로 일본인의 '할복'으로 상징되는 그들의 전체주의였다. 수치를 죽음보다도 싫어하는 일본인의 행동은 서양인들에게는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죽지 않고 수치를 감당하며 사는 서양인들의 삶이 또한 미친 것으로 보였다. 요노이는 점점 포로들에게 일본인의 사고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포로장 척크리스를 포함한 포로들은 더욱 반항했다. 셀리어스는 어땠는가? 그는 단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셀리어스는 일본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반항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것을 지킬 뿐이었다. 당당하게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성가를 불렀다. 그리고 요노이에게도, 서양의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영화가 보여주는 정답은 로렌스다. 오로지 로렌스만이 중간에서 모든 이를 이해하려 하였다. 그는 서양인이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알고, 일본의 문화를 알고 있으며 일본군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등장인물이 모두 로렌스와 같았다면 이곳은 더 이상 전장이 아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렌스의 태도에 대한 일본의 대답은 하라 상사이다. 영화의 제목인 'Merry christmas. Mr.Lawrence'는 로렌스의 말이 아니라 로렌스에게 던지는 하라의 말이다. 그는 로렌스를 만나기 전에 일본인이었지만, 훗날에는 영어도 배우고 서양인의 문화도 받아들였다. 비록 패전 후에 처형을 당하게 되었지만, 하라는 전혀 불행하지 않았다. 평화의 날인 크리스마스가 전장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이 서양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했으니까.
일본의 제국주의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 깊은 동감을 가질 수도, 서구 중심의 시각에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체의 작품성에 더해 젊은 날의 기타노 다케시와 사카모토 류이치를 보는 즐거움과 너무나도 좋아하는 OST로 항상 추천하고 싶은 명작이다.
평점 ★★★★☆
Reviewed by lk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