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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Aug 03. 2021

즐기는 4등

그의 '238'을 응원하며, 나의 버킷리스트에 용기내기

오늘 밤 높이 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육상 국가대표 우상혁 선수가 높이뛰기 경기를 4위로 마감하며 밝힌 소감이다. 딱 2cm만 더 넘었으면 동메달도 가능했을 텐데 TV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아쉬워했겠지만 정작 본인은 밝은 미소를 짓고, 크게 환호하며 행복하다고,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도 같이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금은동 메달에만 박수를 보내는 보통의 우리들에게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것을 이 선수가 알려 준다.     


당연히 금메달 따겠지 하는 효자 종목들, 또는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는 인기스타 경기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때 묵묵히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배드민턴 세계랭킹 38위의 허광희 선수는 랭킹 1위 일본의 모모타 겐토를 2-0으로 완파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관심 밖의 선수, 38위가 1위를 이기긴 어렵다는 선입견 때문인지 방송 중계가 되지 않았다. 평소 잘 접하지 못하는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 대표팀의 동메달 결정전. 체격 좋은 유럽의 선수들을 상대로 15-25로 패색이 짙은 경기였지만 한점 한점 쫓아 올라가더니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었다. 4명의 선수가 얼싸안고 우는데 마치 내 새끼들처럼 자랑스러웠다. 금보다 빛나는 동메달이다.      


외국 선수들의 메달 잔치로만 여겨진 육상은 또 어떠한가. 대부분 박진감 넘치는 달리기 외에 육상 종목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다. 금메달 기대는커녕 우리나라 선수가 뛴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속에 우상혁 선수가 아랑곳하지 않고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며 자신에게 말한다. 

“이제 시작이다”

자신의 최고 기록 2m 31을 넘어 2 m33, 2m 35를 연거푸 넘었다. 기존 2m 34였던 국내 신기록을 24년 만에 갈아치웠다. 2m 39에 도전했지만 정말 아쉽게 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멋지게 거수경례를 하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승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세계 1위와 담대한 경기를 하는 선수. 뒤집기 힘든 격차의 점수를 역전하는 선수.  

특히 메달을 따지 못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우상혁 선수,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이때 알고, 좋아하고, 즐기는 대상은 도(道) 일 수도 있고 학습의 대상일 수도 있으며 삶 그 자체일 수 있다(윤채근, ‘논어 감각’). 지적 능력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차곡차곡 머릿속에 저장하는 작업이 ‘아는 단계’이다. 아는 것을 뛰어넘어 그 대상 자체를 좋아하고 이면의 숨겨진 진실까지 끌어안는 것은 ‘좋아하는 단계’ 일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대상에 몰입하여 나를 가로막는 현실적 조건들을 뛰어넘고 오직 대상을 마주한 현재만을 생각하는 그 자체가 ‘즐기는 단계’이다. 공자의 말로 본다면 우상혁 선수는 진정 ‘즐기는 자’였다.      


우상혁 선수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른발 길이가 왼발보다 1cm가량 짧다고 한다. 육상 선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코치가 높이뛰기로 바꿀 것을 권했고 입문 1년여 만에 전국대회를 휩쓸었다고 한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끊임없는 훈련으로 다져진 실력, 즉 아는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간다.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까지 매번 승리만 있었겠는가. 실패와 부상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목표인 올림픽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단계에 진입한 우상혁 선수는 2021년 8월 1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즐기는 자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준다.      


메달을 따지 못했으니 연금 혜택도 병역혜택도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4등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자기 암시를 하며 달려 나가는 그를 보며 함께 할 수 있다고 외쳤고, 우리나라 신기록을 세울 때 감격했으며, 실패했어도 그의 환한 웃음에 설레었다. 그리고 나에게 묻게 된다. 너는 너의 자리에서 즐기고 있니? 아... 자신이 없다. 즐기기는커녕 아직 좋아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불안하다. 

    

남과 비교하니 내가 이룬 성취들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아무리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도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 꾸역꾸역 사는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환하게 웃는 우상혁 선수가 내 마음에 콱 박혔나 보다.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즐겁게 가는 그를 보며 ‘아는 자’가 되기 전 내가 내 편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든다.       


우상혁 선수의 SNS 아이디는 ‘WOO_238’이라고 한다. 높이뛰기 선수가 자신의 키 50cm 이상 뛰는 게 매우 힘들다고 한다. 키가 188cm인 그는 그래서 평생의 목표를 2m 38로 잡았다고 한다. 이미 이번 올림픽에서 2m 39에 도전해 보았으니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닌 것 같다. 그의 '238'을 응원하며 내 버킷리스트에 적힌 목표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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