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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Jun 25. 2021

책을 버리며

책을 버렸다.


내 책장을 넘어 아이의 책장까지 침범했던 책들을 소환했다. 차마 버리기 아까워 베란다 구석에 겹겹이 쌓아두었던 책들을 모조리 끄집어내었다. 먼지에 숨 못 쉬던 책들이 하얗게 얼굴을 드러내었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니 주춤한다. 책들은, 이 정도 너의 곁에 있었으면 되었다고 한다. 

그래 이제 진짜 버린다.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쉬워 아껴가며 읽었던 책, 이 부분은 꼭 기억해야지 수많은 페이지 끝자락이 접힌 책, 어쩜 나와 이리 생각이 같은 거야 감탄한 책, 번뜩 치고 나오는 아이디어를 나도 못 알아보게 휘갈겨 쓴 책, 산지 모르고 또 산 책. 하나씩 하나씩 펼쳐보니 다시 못 버리겠다. 사고 싶어도 못 사던 그때가 생각났다.

 



99학번인 나는 IMF를 직격으로 맞은 세대다. 더군다나 아빠가 목회를 시작하시며 서울에서 고향인 안성으로 내려가 교회를 개척하셨다. 부모님은 안성에, 언니와 동생과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부모님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학비와 생활비는 내가 벌어야 함을 눈치챘다. 대학교 1학년, 전공책을 거의 사지 못했다. 대신 도서관에서 대출했고, 반납 기한이 되면 연장하고, 연장도 더 이상 어려우면 반납했다가 바로 대출하는 방법으로 한 학기를 버텼다. 참으로 궁상맞았다.


국민학교 시절, 정확한 학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아빠가 교보문고에 데려가 “사고 싶은 책 모두 골라봐”라고 하셨다. 나의 첫 책 ‘모모’를 읽고 책이란 이렇게 재밌는 거로구나 알게 된 뒤라 신이 나서 골랐다. 아빠 맘이 변할까 봐 어떤 책인지도 모르고 눈에 띄는 대로 골랐다. 양손 낑낑대며 집으로 향할 때, 무거운 봉지 손잡이에 손이 빨갛게 되어도 한동안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어릴 때 행복한 기억 때문인지 궁상맞은 대학생, 책을 사고 싶으면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교보문고는 내 아지트. 책 냄새가 황홀했다. 돈 없는 나를 품어주는 그곳이 엄마처럼 아늑했다. 하루 종일 읽다가 문득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서점과 출판사가 망하겠다 싶었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아르바이트 월급을 타면 고민 고민하다 책 한 권을 샀다. 그 한 권이 얼마나 뿌듯한지. 힘들게 벌어서 산 책이라 나의 일부처럼 대했다. 그래서 지금도 교보문고(온라인)에서만 책을 사나 보다. 공짜로 읽게 해 준 고마움을 갚기라도 하듯.


그런 20대를 보내서인지 나는 중학교 1학년 아들이 책을 사달라고 하면, 그것이 고전이나 필독서가 아니더라도, 한 때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책이라도 상관없이 무조건 사준다. 아이 입에서 책 사달라는 말이 극히 드물어서 아쉬울 뿐이다.

 



버리는 책 들 중엔 사회복지 전공 책들이 가장 많다. 대학생 때는 사지 못했던 그 책들이다. 학부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생기면서 이렇게 저렇게 책이 많아졌다. 출판사만 다르고 같은 과목 책들이 많아지면서 혹시 스무 살 때 나와 같은 학생이 지금도 있을까 싶어 슬쩍 물어보고 필요한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뒤늦게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지인들에게도 나누었다. 20여 년 전 궁상떨던 대학생은 그렇게 책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책은 버리지만 그 안에 케케묵은 추억은 마음 창고에 두었다. 책을 살 때의 그 설렘도 그대로 넣었다. 내가 밑줄 그은 그 문장들이 기억에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책 안에 마구 적었던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언젠가 쓸모가 있기를 기도했다. 작가의 명문장을 나도 흉내 낼 수 있기를 소원했다.

 



새로운 책을 데려왔다. 내가 사고 싶을 땐 언제든 산다. 가격이 꽤 나가도 고민하지 않는다. 읽고 싶고, 갖고 싶은 책은 다 데려온다. 얼마 전 10권을 한꺼번에 샀다. 부자가 별거 아니다. 이제 책을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언제 다 저 책을 읽을 것인가가 고민이다. 이런 고민이 그저 행복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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