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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May 31. 2021

행복한 우주먼지가 되자.

얼마 전 TV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97회에 회사를 다니다 천체사진작가로 이직한 권오철 작가가 출연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박차고 돈벌이가 보장되지 않는 사진을 찍겠다 했으니 가족들도, 누구보다 본인도 불안했을 것이다. 14년 회사 생활은 지옥이었단다. 야근, 주말 근무, 끝없이 쌓이는 산더미 같은 일 대신 대학 시절 그의 마음을 빼앗아 갔던 밤하늘의 별, 오로라 등 천체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자 결심한 것이다. 밤하늘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는 천체 사진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며, 우리나라는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가 찍은 캐나다 오로라 사진은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오늘의 천문학 사진’에 선정되어 한국인 최초의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우연히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진 1도 모르는 내가 봐도 작가의 천체 사진은 황홀하고 경이롭다. 안정된 직장을 나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그의 용기에 함께 빠질 무렵, 작가의 한마디가 우리 부부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우주 앞에서 인간은
아주 작은 우주 먼지일 뿐이다.
어차피 우주의 먼지라면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자!


천체 사진을 찍는 그는 광활한 우주를 느끼며, 한없이 작은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아웅다웅 부대끼는 삶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도 깨달았을 것이다. 2009년 캐나다에서 오로라를 본 뒤 사표를 제출한 건 바로 행복한 우주 먼지가 되기 위한 시작인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원한다. 그러나 삶은 좋아하는 것 대신, 해야 하는 일로 우리를 내몬다. 지옥 같은 회사여도 나가서 돈을 벌어야 우리 가족이 먹고 산다. 어릴 때 가슴 뛰게 했던 것들은 그저 꿈일 뿐이니 그걸 바라는 건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다. 남편 역시 회사 다니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쳇말로 더러운 꼴도 참아야 하고, 수십 번 사표를 쓰고 싶어도 가족을 위해 삼켰을 테다. 퇴근 후 남편은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거나 사진 동호회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올린 사진을 본다. 가끔 주말엔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러 나간다.

남편이 찍은 안성 풍경

카메라는 왜 이렇게 비싼 거냐, 카메라만 있음 됐지 렌즈는 또 왜 사야 되는 거냐, 주말에 집 청소 좀 같이 하면 안 되냐. 나의 잔소리에 주저앉기도 한다. 사진과 카메라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마누라의 잔소리보다 자신이 카메라를 만질 때, 사진을 찍을 때 행복하다는 것을 몰라주는 마누라가 섭섭했을 것이다.


최근 글쓰기 학교(로고스서원)에 참여하며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글도 쓰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을 남편에게 했었다. 우와 좋겠다. 맞아 사람은 좋아하는 것 하면서 살아야 돼. 그렇게 말하는 남편을 보고 아차 싶었다. 나만 행복하면 안 되지. 미안했다.


며칠 뒤 남편에게 현금 100만 원을 주었다. 오래되어 고장 난 삼각대를 버리고 새로 사라고 했다. 남편 눈이 얼굴만큼 커졌다. 정말 사도 돼? 진짜야? 그래 맘 변하기 전에 빨리 사. 오해하지 마시라. 100만 원은 우리에게 살 덜덜 떨리는 거금이다. 시장 볼 때 몇 백 원 몇 십원 아끼려고 이것저것 비교하고, 사은품이 붙어있는 물건으로 사는 나다. 내가 돈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남편 몰래 로또가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1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이다. 미안해서 선뜻 받지 못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때 텔레비전 함께 보면서 생각했어. 우리가 그 작가처럼 생업 포기하고 좋아하며 하고 싶은 일만 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설레고 가슴 뛰는 것 하고 나면 그 기운으로 일주일 잘 버틸 수 있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이 그래도 미안해하길래, 나 글쓰기 학교 1년에 120만 원 들어. 그러니까 얼른 사.

 

 남편이 며칠 고민하다 구입한 삼각대

100만 원 가지고는 최고급 삼각대를 사지 못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아무렴 어떤가 서로 좋아하는 일을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는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도 행복한 우주 먼지로 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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