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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Dec 03. 2019

시립대 찬가

아름다운 캠퍼스의 단풍에 부쳐

 완연한 가을, 강의차 서울시립대 캠퍼스를 방문했다. 한 주 전에 라오스 해외봉사 기본교육을 진행했던 터라 두 번째 방문이었다. 저녁이었던 이전과 달리 한낮의 캠퍼스가 보일 때 강의시간이 잡혀있었다. 예정보다 빠듯한 시간에 도착해 정문을 지나 21세기관으로 급히 걸어가는데 문뜩 숲 속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수풀이 우거진 캠퍼스는 아니었지만 걷는 길 좌우로 단풍이 가득했다. 높은 나무들 뿐만 아니라 낮은 풀들도 잘 가꿔져 있고 찬 가을 공기에 숲 내음이 가득했다.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고, 산이나 공원도 아닌데, 오랜만에 느끼는 산뜻한 기분이었다.


 한 시간 예정이었던 라오어 강의를 마치고 이어진 질의응답은 무려 40분이나 진행됐다. 시립대 학생들의 첫인상은 대단한 집중력이었는데, 역시나 많은 생각들을 했는지 깊이 있고 중요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강의 경력이 대단히 길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질의응답은 처음이라 기분 좋음과 동시에 조금 지쳤다. 워크숍을 이어가는 학생들이 있는 공간 한편에서 교직원 선생님과 점심을 먹으며 추가 질문을 받아줬다. 입 짧은 나는 피자 한 조각이면 족해 금방 털고 일어나 산책을 나섰다. 선생님께서 캠퍼스를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는데 나는 시립대 학생들이 정말 부러워지고 말았다.


서울시립대 음악관 앞 하늘못
서울시립대 음악관 앞 하늘못


 물론 시립대 최장점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저렴한 학비를 꼽을 것이고 이건 물론 중요하다. 대부분 취업하고 몇 년이 흘러도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요즘이니까. 하지만 나는 고작 두 번 방문한 캠퍼스와 사랑에 빠져 버렸다. 어떤 학생들은 시립대 캠퍼스가 볼품없고 좁다고 불평한다는데, 조금 큰 고등학교만 한 캠퍼스를 다녔던 내가 보기엔 자연농원 급의 캠퍼스였다. 아닌 게 아니라, 캠퍼스 구석구석 어디에나 나무가 가득했고 잘 가꿔져 있었다. 모교의 캠퍼스에는 건장한 학생이면 달려 뛰어넘을만한 크기의 못이 전부였는데, 여기에는 정말 호수라고 부를만한 못이 있었다. 첫날 강의장 근처에서 오리 소리를 들었는데 낮에 보니 그곳에 못이 있었다.


 시립대에 환경원예학, 조경학, 도시를 공부하는 학생과 교수들이 많아서일까. 100년은 족히 돼 보이는 박물관, 경농관, 자작마루 근처는 작은 테마파크 같았다. 역사를 짐작케 하는 빨간 벽돌에 담쟁이넝쿨 하며, 구석구석 억새까지 예뻤다. 분명 드라마나 CF 꽤나 찍었을 경치였다. 학내에 고양이들이 많이 살고 보살피는 학생 단체도 있다는 말을 들으며 구경할 즈음엔 낮지만 푸른 배봉산이 보였다. 그곳에는 도보 산책로와 휠체어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점심시간에 짧게 걷기 좋다고 한다. 아니, 굳이 배봉산이 아니어도 매일 다른 길로 캠퍼스를 걸으면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겠다.


역사가 느껴지는 경농관과 박물관 안팎
역사가 느껴지는 경농관과 박물관 안팎


 예쁨을 많이 받아 살이 포동포동 오른 고양이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지나는 학생들도 연신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참새며 까치며 새들도 어찌나 많은지 새소리도 끊이지 않고 들린다. 캠퍼스 구석구석엔 추위를 피할 고양이집이나 밥그릇, 새 모이 그릇 등이 있었다. 동물이 살기 좋은 곳이 사람도 살기 좋은 곳일 테니 시립대 캠퍼스는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재밌는 건 낮에는 고양이판, 밤에는 근처 견주들이 모여들어 개판이 된다는 것. 고양이가 야행성 아닌가 싶지만 불쌍한 견주들은 퇴근이란 과업을 이뤄내야 개들을 산책시킬 수 있을 테니 어쩔 수 없겠다.


캠퍼스 구석구석의 모습과 사람따위 아랑곳 않는 개냥이
캠퍼스 구석구석의 모습과 사람따위 아랑곳 않는 개냥이


 너무 좋았던 나머지 친구 S와 근처 떡전교 앞에서 기차소리 들으며 맥주 한 잔 기울이다 해가 진 캠퍼스를 다시 찾았다. 천천히 한 바퀴 돌다 전농관과 건설공학관 사이 작은 동산에 올랐다. 시립대 학생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게 무슨 동산이냐 코웃음 칠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얕아도 동산은 동산이었다. 다리가 아파진 이후 아무리 얕은 산도 오르-걷-기를 거부해왔던 나니 정장에 구두까지 신고 얕은 동산을 오른 건 오랜만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얕은 동산이어도 밤에 숲 내음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문득 시립대 캠퍼스의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써봐야겠다 싶었는데 아쉽게도 찍어둔 사진이 하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일주일 후 다시 시간을 내 방문했는데 그새 낙엽은 많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좋을 때 찍어뒀어야 했다.


 기차소리 들으며 한 잔 기울였던 친구 S와 가좌역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가좌에서 신촌까지 경의중앙선 기차를 탄 적이 있다. 기차를 기다리며 서울에 살면서도 경의중앙선 기차를 타기는 처음이라며 이 또한 여행 아니냐며 웃었다. 비록 한 정거장이면 끝이었지만 2호선 신촌역이 아닌 경의선 신촌역에는 처음 내려 봤으므로. 그날 기차를 타기 전 모래내 시장에서 신중하게 고른 메뉴로 식사를 했고, 저녁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일상도 작정하고 떠나는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익숙한 듯 생소한 곳에 가고, 고심해서 한 끼를 해결하며 추억을 쌓곤 한다.


 가을 시립대 캠퍼스를 찍고 싶다는 목적의식이 있었지만 이런 여행의 기분으로 다시 찾았다. 등촌동에서 전농동까지 지하철을 갈아타고, 1호선을 오랫동안 달려 어릴 적 기차여행이 있는 청량리역을 거쳐 간 길. 아쉽게도 주말에 내린 비로 단풍은 많이 져 절정을 찍진 못했다. 그래도 내년 가을에도 시립대 캠퍼스에는 예쁜 단풍이 들 테니 그때 단풍 여행을 떠나야겠다. 단풍보다 현란한 아웃도어 등산복 무리를 만날 일도 없으니 단풍 여행으로 제격이다.


다채로운 보도블록과 경계석의 조화에서 디테일이 느껴진다


 봄에는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돗자리를 들고 모인다니 봄의 캠퍼스도 즐겁겠다. 여름에는 푸르겠고, 겨울에는 하얗겠지. 몇 해 전 가본 눈 덮인 홋카이도 대학만큼의 감흥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시립대는 또 그 나름의 매력이 있을 테니 눈이 많이 온 날 찾아봐야겠다. 캠퍼스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벤치가 구석구석 넘쳐나고, 보도블록 하나하나 세심함이 느껴지는 캠퍼스라니, 부디 시립대생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뭐라고 이걸 바라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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