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손톱의 멍이 모두 없어진 것을 눈치챘다. 3주 전 라오스에서 첫 빨래를 맡길 때 봉투를 묶다 손톱이 들리며 생긴 멍이었다. 손톱에 검은 때가 낀 것 같이 보여 계속 신경 쓰였는데, 라오스를 떠날 때가 되자 멍이 빠졌다. 그만큼 길어진 손발톱을 잘라야지 생각하고선 귀찮아서 다음날로 미뤘다. 그날 밤 새끼발가락을 침대 다리에 찧으며 새끼발톱에 멍을 얻어 버렸으니, 나는 참 미련한 사람이다.
라오스 같은 동남아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단단한(무섭도록 딱딱한) 테이블과 의자 세트가 많다. 우계에 비를 아무리 맞아도 상관없이 쓸 수 있어 인기가 많단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런 가구를 쓰다 보면 정강이나 종아리에 멍이 들기 십상이고 작은 생채기도 자주 생긴다. 익숙지 않은 환경으로 몸을 던지는 게 여행이라 그런지 종종 여기저기 상처가 생기고 또 어느새 조금씩 아물어 옅은 흉터를 남기곤 한다.
보기엔 예쁘지만 부딪히면... 흉기다
라오스는 참 안전한 나라다. 치안력이 강하진 않지만 사람들 천성이 선하다. 남의 물건을 탐하는 일도 거의 없어 두고 간 여권이니 지갑, 스마트폰을 문제없이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숙소에서 체크아웃하며 하우스키퍼를 위해 아주 소액의 팁을 베개에 올려두고 나왔는데 쫓아와서 두고 갔다 돌려준 일도 있다. 빠듯한 예산에 아주 저렴한 마사지샵을 찾았다 머리맡에 스마트폰을 두고 나왔는데 달려와 쥐어주기도 했다. 길을 건너려 도로를 바라보다 보면 세상에 이런 카오스가 또 있을까 싶은 베트남과는 달리 오토바이도 차들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니는 곳이다. 시골길을 걷다 식사하는 가족과 눈이 마주치면 밥은 먹었는지 묻고 같이 먹자 권하기도 한다. 잔치집을 지날 때면 함께 앉아 비어라오 한 잔 하라 권하는 그런 곳이다. 정들지 않을 수 없고 그만큼 그리우니 자꾸 다시 찾게 된다.
이러나저러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정신 놓고 살다 간 탈이 나기 마련이다. 소매치기 걱정은 거의 놓아도 되는 곳이지만 요즘엔 가끔 당하는 사람들이 있단 소식도 들려온다. 숙소 가방에 무턱대고 둔 돈을 잃은 친구도 있고, 약물 사건도 있다지만 평상시에 정신 차리고 사는 만큼만 신경 쓰면 대부분 괜찮을 일이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공항에 일하는 직원들이 위탁 수화물의 액체수 운운하며 캔맥주 등을 압수하는 일이 생긴다. 세관 직원도 아닌데 특별한 규정도 없이 제멋대로 꺼내라고 해선 돌려주지 않는다. 기내 휴대 수화물을 갖고 들어가던 상황이면 이해가 가지만 발권 카운터에서 그러니 얘기가 다르다. 나처럼 라오어를 조금 하는 사람이 현지어로 물으면 당황하며 마지못해 내어주긴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뺏기는 것이다. 먹고살기 힘든 곳에서 종종 있는 일이라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다가도 여행자가 비행기에 흘리고 간 여권을 며칠째 수소문하며 찾아주는 직원을 만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역시 라오인이지.' 싶어 지기도 한다.
황홀한 맛을 잊지 못해 챙겼다가 뺏기곤 하는 비어라오. 엄지 끝에 든 멍이 보인다.
크고 작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요금을 가지고 장난치는 뚝뚝 기사를 만날 때면 정든 사람들에게서 작은 상처 하나씩, 멍 하나씩을 얻는 기분이다. 현지인뿐이 아니라 이건 함께하는 일행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친하고 잘 맞는 사이라 해도 항상 내 맘 같을 순 없는 법이다. 사소한 의견차나 그때그때의 기분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물론 나도 함께한 긴 시간만큼 일행에게, 또 현지인에게 상처 꽤나 줬겠지. 낯선 삶의 농축 버전인 여행에선 이렇게 몸에도 마음에도 상처나 멍이 생기곤 한다. 툭, 툭.
다행인 건 생채기는 며칠이면 아물고 시간이 흐르면 멍도 옅어지다 어느새 빠진다는 것. 그러므로 멍이 빠진 자리엔 좋았던 추억들만 남아서 다시 그립고, 다시 찾는 여행을 떠난다. 다시 만나면 언제 왔냐고, 건강하냐고 물으며 그저 반가움만 남는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함께했던 추억을 안주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다, 그래서 언제 또 갈 거냐고 서로를 보챈다.
치앙마이의 한 호스텔 로비에 앉아 글을 쓰다 문득 발톱을 보니 멍이 거의 다 빠졌다. 이번엔 다행히 열흘 정도만에 빠졌고 손발톱을 짧게 손질했다. 한 여행에서 두 번이나 멍을 얻고서야 제때 자르는 법을 배웠다.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며 멍들지 않는 방법들도 배워가고 있으리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