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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Aug 27. 2018

M작가 하노이 보내기

여행병의 숙주가 되어보자

 나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삶이 곧 여행이라 믿는다. 집이 있는 나의 고장에 머물 때에도 마음은 항상 다른 고장 다른 나라에 붕 떠있곤 한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당장 미래에 큰 기대도 없지만 여행만은 꿈꾼다. 그 꿈에는 더 변하기 전에 가보고 싶은 지구 반대편의 쿠바도 있고, 골목길의 보도블록까지 예쁘다는 유럽도 있다. 미디어로 주로 접했지 사람도 몇 번 만나보지 못한 아프리카나 남미도 동경한다. 그럼에도 가까운 미래에 꿈꾸는 여행지는 오히려 가본 곳들이 더 많다.


올해 두 번이나 여행병의 숙주가 되었던 삿포로의 한 징기스칸집

 그건 아마도 여행병 때문이겠다. 큰 기대를 안고 갔든 혹은 별다른 기대 없이 갔든 여행의 구석구석엔 여행병 숙주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그 숙주는 맛있는 음식, 독한 술이나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음에 새겨진 경치나 우연히 마주친 사람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세상은 넓고 내가 가본 곳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되고 스스로를 여행 가라 소개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주변인의 평균치보다는 더 움직여서일까. 나를 굉장한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여행병의 숙주가 되어보자 마음먹었다. 나의 고장으로 여행 온 이들에게 여행병을 옮기는 것도 좋겠지만 내 생활 반경에선 좀처럼 여행객을 마주치기 어렵다. 매일 나의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병을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주변인에게 옮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갈만한 곳을 묻는 이에게 도시 이름 툭 던져주는 것 이상으로 조금 더 동기부여를 해준다든지 맛집 정보를 얻는 이에게 밥 먹다 여행병 도질 집을 새겨준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렇듯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몇 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던 20대 때 나에게는 바이블 같았던 '청춘의 문장들'을 쓴 김연수 작가가 그중 한 명이다. 유명한 소설가이지만 그의 소설보다는 수필을 더 좋아한다.(사실 누구의 책이든 소설보다 수필이 내 취향이긴 하다.) '여행할 권리', '7번 국도'등 많은 여행 경험과 통찰을 보여주는 책들에 이어 최근에는 '언젠가, 아마도'라는 책도 펴냈다. 이 작가의 책을 읽다 보면 매 페이지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무엇이 있다. 그게 여행 이야기라면 톡톡 보다는 툭툭이나 콕콕 같이 조금 더 강해지고.

김연수 작가의 수필들. 교보문고 캡처

 또 다른 내가 좋아하는 M 작가는 수필을 주로 쓰는 작가이다. 이 작가의 10대 이야기나 20대 이야기를 읽을 때면 동감이 가서든 나와 같아서든 혹은 나와 달라도 너무 깊이 전달되어 많이 울고 웃는다. 편안하게 쉬이 잘 읽히는 글을 써주는 그와는 마침 페이스북 친구여서 일상 이야기에 댓글 정도는 남기는 애매한 사이다. 실제로는 각가와의 만남 같은 자리에서 한 번 대면하고 사인받은 게 전부인 사이지만.


 그가 습관처럼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여행의 즐거움을 알만큼 여행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 지레짐작해본다. 더군다나 해외여행은 가본 적이 없는 M 작가. 몇 개월 전 첫 해외여행을 마음먹었다 가지 못하게 되었고 일면식도 없지만 이름이 같은 사람을 인터넷으로 찾아 표를 양도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 프로젝트는 그대로 의미 있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결국 작가는 첫 해외여행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불현듯 그의 발권 내역이 올라왔다. 행선지 공항코드를 가렸지만 비행시간을 보니 마침 내가 몇 번 다녀온 나라임이 분명했다.


 가려진 공항코드를 보고서 행선지를 유추한 사람은 나뿐이 아니어서 많은 사람들이-딱히 퀴즈는 아니었지만-정답을 맞혔다. 작가는 꽤 설렌 듯했는데 동시에 해외여행에 관해선 아는 게 너무 없어 보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상당한 통찰을 가지고 그걸 좋은 글로 적어내는 그이지만 겪어보지 못한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맛집을 알려주겠단 나의 댓글에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숙소 찾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네이버에 '하노이 숙소' 식으로 검색 중이라기에 숙소 예약 앱을 알려줬다. 여행 목적과 컨셉을 듣고 대략적 추천 동네까지 잡아줄 때쯤 좋은 여행이 되도록 도와 여행병에 걸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간략하고 허접하기 그지없는 올드쿼터 소개와 숙박앱 사용법 전수

 재밌는 건 작가도 기왕에 궁금한걸 나를 통해 많이 해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건 참 다행이었는데 묻지도 않는 이에게 막 이것저것 알려주는 것도 좀 서로 우습고 뻘쭘하니까. 택시나 우버를 타는 법, 환전을 유리하게 하는 법, 여권 분실에 대비하는 법, 포켓 와이파이를 쓰는 법 등등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줬다. 물론 가볼만한 맛집 두어 군데도 함께. 이쯤 되니 친한 동생 S가 나보고 성덕이란다. 팬심 가득 갖고 있는 작가랑 이만큼 대화해 볼일이 어디 있냐며. 그래 어려서부터 별의별 덕질을 다 해온 덕후인데 이번 건은 좀 성덕이 된 느낌이다.


 작가의 발권 포스팅 이후 며칠간 저녁나절엔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인천공항을 통해 처음 출국하는 그를 위해 출국장 넘어가는 법 까지 알려주고 나니 오늘 아침 곧 이륙한다는 글을 남기고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을 벗어났다. 지금 쯤이면 공항에 착륙해서 아마 입국심사장에 줄을 섰거나 입국도장받고 짐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내 여행만큼이나 그의 여행에 걸린 나의 기대가 크다. 난생처음 외국 땅을 밟고 새로운 환경에서 헤맬 초보 여행자에게 뭐 내 기대까지 거냐 싶겠지만 팬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나. 항상 좋은 글을 적어주는 그 작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어떤 글을 보여줄까.


 그는 과연 여행병에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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