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매우 정정하시던 아빠가 갑작스레 위독해지셨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누워 계셨다. 정말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병원에 실려가셨고 엄마는 병원에서 계속 아빠 옆을 지키고 계셨다. 나는 여덟 살이었고 내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은 각각 스물하나, 열아홉, 열여섯 살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초조하게 엄마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큰 언니가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은 언니는 “아빠가 돌아가셨대.” 하고 말했다. 간암이라고 했다. 언니들은 울었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언니들 옆에서,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상황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처음 맞은 순간, 어린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단 얼떨떨함과 당혹감, 두려움이 뒤섞인 어떤 것이었다.
아빠의 장례식 날은 몇 장면의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아주 흐리고, 부슬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엄마와 큰언니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 흰 리본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이제 못 보는구나’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의 팔을 잡고 땅속에 내려진 관위로 한 삽의 흙을 뿌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 뿌려지던 흙을 바라보는 게 아주 낯설고 이상하고 무서웠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깊이 느낀 건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 난 후였다. 엄마는 밤에 딸들 몰래 숨죽여 울곤 했다. 어린 나도 엄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들었다. 난 엄마를 웃겨주려고 괜히 실없이 엉덩이춤을 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도 했다. 아빠가 집에 없는 삶이 조금씩 실감이 나면서 슬슬 슬픔의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정환경조사서를 내는 게 싫었고, 이후 몇 년간은 친한 친구에게도 아빠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울지 않고 담담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든든한 내 편인 한 사람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초중고 학창 시절을 거쳐, 대학 입학과 졸업, 취업, 결혼, 출산 등 삶의 변곡점들을 지날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고 그리웠다. ‘이런 순간들을 아빠와 공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엔 내가 너무 어려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자식으로서 내가 아빠를 그리워한 것보다 하늘에 계신 아빠가 나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훨씬 더 깊고 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리적으로 만날 수는 없지만 이제 아빠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게 된 듯했다.
내 아이는 어느덧 커서 아빠가 돌아가셨던 그때의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난 아이에게 종종 외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외할아버지는 정말 재미있고 다정한 분이셨어. 엄마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데, 그곳에서 연이도 지켜보고 계신대. 엄마는 오늘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이는 어느 날 공원에서 비눗방울을 불다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좋은 생각이 있어. 여기 비눗방울에 외할아버지한테 마음을 담아서 올려 보내자. 그러면 하늘나라까지 닿을 거야.” 울컥했다. 마음이 찡했다. 내 말을 마음에 담고 기억해 준 아이에게 고마웠다. 난 오늘도 아빠가 보고 싶다. 아이가 말한 것처럼 비눗방울에 내 마음을 담아 전하고 싶다.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는 걸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끝이 있기에, 지금 함께 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용기 있게 더 사랑하며 살게요. 하늘나라에서는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