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제품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나의 일은 대부분 미팅과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때론 쉽게 잊는다.
현장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노고와 헌신을.
FAB이라 불리는 반도체 라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조명의 색은 한 순간에 바뀌고,
머리 위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장치들과, 일렬로 늘어선 대규모의 장비들이 들어서 있다.
인류가 설계해 놓은 디지털 세상이 모래로 만든 작은 판 안에 알알이 새겨지는 모습이다.
인터넷과 메타버스 그리고 인공지능이 손톱만 한 한 뼘의 세상 속에 만들어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일하고 있다.
세세한 이유는 모두 다르겠으나, 큰 줄기에서는 모두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설비 엔지니어, 공정 엔지니어. 설비를 운송, 설치하는 테크니션분들, 장비 메이커 엔지니어
그리고 직접 현장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 주시는 직원분들까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현장에는 여러 사람들의 흔적과 노고가 쌓이고 쌓여,
미래의 모습을 그려지고 있다.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를 직접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따금 다시 겸손을 배운다.
세상의 풍경을 그리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이고, 그 앞에 매일 조금씩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 속 다양한 길과 그 위에 다양한 사람들의 노고가 온전히 인정받고, 또 진심으로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빛나게 될까.
우리 모두가 각자 사람들의 노고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의 길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 이 현장에서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며.
PS.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볼 수 있는, 마주 오는 버스의 기사님들끼리
서로가 아는 신호로 몸짓으로 인사하는 장면.
그 장면엔 언어가 없지만,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많은 의미를 준다.
그대의 안녕, 나의 안녕. 그리고 우리의 노고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