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다층위성

by 자치언론 파란

재주 디자인 나무


# 서론

여러분은 사랑의 총체를 설명해 본 적이 있나요? 연애 프로그램에서의 설렘, 가족 간의 유대관계,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 등 사랑엔 원초적으로 따라오는 몇몇 상황이 있습니다. 익숙한 사랑의 모습은 진부한 만큼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고민할 필요를 없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로맨스가 사랑의 전부로 느껴지는 것처럼요. 만일 누군가 판에 박힌 사랑 너머를 들여다보려고 해도 사랑은 문맥에 의해서, 상황에 의해서 일부분 포섭될 뿐 그 전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령 애정, 집착, 욕구, 충동 등 사랑의 속성으로 흔히 고려되는 요소들은 쉽사리 ‘연애 관계’라는 맥락에서 이해되곤 하죠. 코웃음 치며 사랑을 무시하는 상황에서조차 그것은 더욱 고개를 들이밉니다. “사랑 따위 필요 없어. 사랑 같은 건 안 해도 돼”라며 사랑에 ‘따위’라는 말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역설적으로 사랑의 거대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존재감을 축소하려는 어색한 노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엔 ‘거대하다’라는 표현으로 길들지 않는 나머지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개인 간의 고유한 사랑을 부모, 연인, 친구 관계로 완전히 치환할 수 없듯이요. 물론 완전히 정의할 수 없다고 흔한 사랑의 공식에 안주하는 태도도 답은 아닙니다. 한때 히피 같은 반문화 운동이 자본주의, 물질주의, 소비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했지만, 이후 반문화의 저항 정신이 오히려 소비를 자극하는 매력적인 테마로 자본주의에 흡수됐단 문제점이 제기됐습니다. 그렇다고 기존의 문제를 수정하고자 비판에 몰두한 행위가 퇴색될까요?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새로움을 더하는, 사유의 창조적인 운동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에 대하여 흔한 것 그 너머를 탐색하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고 재창조하는 힘을 길러보면 어떨까요. 여기선 사랑의 개별 사례들에서 의의를 더하기보다, 사랑의 작용 방식을 학문적, 사회적, 역사적 시각에서 넓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 본론

성은 사랑을 논할 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대표적인 영역입니다. 사람이 욕망한다는 것, 성적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보면서, 심적 측면이 다소 강조되어 온 사랑의 이면을 짐작해 보면 어떨까요. 이제부터 소개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사랑을 ‘하찮은 무언가’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 입문』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내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성적 애착을 느끼는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거세 위협, 경쟁 심리를 경험한다는 내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논의가 어린아이가 보이는 특이한 성적 도착을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입문』 (서석연 역), 범우, 2017, 329-348쪽.


(중략) 일반적으로 ‘성’은 ‘성적 매력’처럼 비교적 협소한 맥락에서 쉽게 언급되곤 합니다. 그러나 해당 주장은 성적 에너지(Libido)가 이미 유아기부터 존재하며, 어떤 행동이 용인되거나 금지되는 등의 사회화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여러가지 반박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연애적 맥락에서 벗어난 담론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이 삶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왜 우리는 사랑을 쉽게 로맨스 장르로 결부 짓게 되는 걸까요?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의를 빌려와 볼까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여러 정의를 살펴보면 주로 사회에 지배적으로 퍼져있는 관념, 사상, 이념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표면적 논의에 한 차원 깊이를 추가합니다. 그는 이데올로기란 개인이 자신의 실제적인 존재 조건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현실 조건을 전부 다 경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들과 우리를 상상적으로 매개하는 역할을 이데올로기가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 조건이 직접 경험되지 않고 이데올로기로 매개되어 인식될 때, 사랑이라는 거대한 무언가, 전부 경험하기가 불가한 무언가도 그 일부분만이 특정한 틀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s)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미디어, 학교, 가족, 교회 등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유지시키는 기구가 바로 ISA인 것이죠. 이때 미디어는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뿐만 아니라 금단의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지점이지만, 미디어가 대표적인 ISA로서 이데올로기를 존속시키는 동시에 사회에 반하는 형태의 사랑도 생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유롭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Having said this, let me move straight on and see what happens to the

“individuals” who live in ideology, i.e. in a determinate (religious, ethical,

etc.) representation of the world whose imaginary distortion depends on

their imaginary relation to their conditions of existence, in other words,

in the last instance, to the relations of production and to class relations

(ideology = an imaginary relation to real relations).”(Althusser, L.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Notes Towards an Investigation). Media

and Cultural Studies, 79.)


필자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저는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문학 작품에서 불륜이라는 소재를 자주 마주했을 때 그랬듯 큰 충격이나 반발심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해당 영화가 불륜을 낭만적으로 미화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땠나요? 다양한 반응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예술을 통해 사회적 터부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실제로 경험했을 때에 비해 비교적 덜 놀라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아이디어를 떠올려보아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면 특정 대상에 대해 사회적으로 용납 불가한 욕망은 성장 과정에서 무의식으로 억압돼야 합니다. 그러나 억압이 그 자체로 욕망의 완전한 소멸이나 해소를 보장한다고 단언하기엔 망설여집니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 옳고 그름을 조절하는 초자아적 질서가 얼마만큼 강하게 작용하느냐의 문제인 것이죠. 그렇기에 억압은 언제든지 귀환할 수 있습니다. 문화 예술에서의 사랑은 바로 이 억압으로부터 귀환한 욕망을 우회적으로 해소하는 하나의 표현 창구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는 역사적으로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현실을 자본주의, 가부장제, 여성의 신체와의 관계 속에서 지적했습니다. 과거로부터 여성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핵심인 노동력을 무급으로 제공해 왔습니다. 무급 가사 노동과 출산이라는 노동력의 재생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페데리치는 『캘리번과 마녀』에서 16~17세기 마녀사냥이 종교적 광기가 아닌 여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국가적 통제 수단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녀는 “많은 마녀들이 여성의 재생산과 관련된 지식과 통제력을 보유하고 있던 ‘현명한 여인들’이거나 산파들이었다는 점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산파를 포함하여 모성을 거부하거나 문란하다고 여겨진 여성들은 모두 마녀사냥의 대상이었으며, 이렇듯 쉽사리 ‘평판이 나쁜’ 여성을 마녀로 몰아간 행위는 여성적인 개성을 내세우는 일체를 파괴하려 한 것이라고도 지적합니다. 즉 여성을 자율적인 주체가 아닌 남성의 권위와 관리하에 있는 신체, 자본주의적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전락시키려 한 시도란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지적은 낭만을 강력한 주축으로 역동해 온 사랑의 이면을 날카롭게 가리킵니다. 여성이 겪은 박해를 마주하면서, 사랑을 머릿속의 낭만적 상황이 아닌 현실의 정치적 도마에 올려 심문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 김민철 역), 갈무리, 2011, 236-308쪽.


*전문은 <파란 12호: 파도 위의 사랑>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결론

지금까지 여러 관점에서 사랑의 새로운 측면을 소개해 봤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사랑이 상징체계의 틀로 완전히 길들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란 점엔 동의하시나요? 반박으로 제시할 수 있는 다른 의견들도 여럿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랑이란 개인이 타인, 사회, 국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후 중 하나인 동시에 실천의 장이란 점은 확실합니다. 어쩌면 타인과 맺는 낭만적 관계가 우리가 이해하기에 가장 쉽고 기초적인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떤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지, 그것의 묘사는 사회적으로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사랑을 하려는 개인이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 등 사랑에 관한 질문이 쌓일수록 우리의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여기서 완벽한 답을 찾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언어를 거치지 않고는 사고할 수 없는데 언어로 모든 것을 포착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미끄러지는 언어의 연쇄 속에서 나름의 답을 지어보려는 모든 시도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파란의 글을 마저 보고싶다면?

지금 바로 <파란>을 구매하세요! 재고 프리오더 진행 중!

브런치 메시지

파란 텀블벅 https://www.tumblbug.com/u/smwuparan

파란 인스타그램 DM https://www.instagram.com/smwu.paran.official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사랑의 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