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투명, 강설 디자인 투명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은 자기혐오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로서 겪는 딜레마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남자에 의존하는 사람인가? 내 행동이 성 역할을 재현하진 않는가? 어딘가 박혀있던 이러한 질문들은 이성과 연애를 하며 특히나 좋을 때, 툭 튀어나와 아픔 아닌 아픔을 주고 갔다. 이는 비단 페미니즘적 정체성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연구 박미선(2022)1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왜곡된 인식이 여성의 감정과 선택, 행동 전반을 내외부적으로 규율하는 감정 정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미선. (2022). 신자유주의 감정 정치와 영미권 신자유주의 페미니즘. 영미문학페미니즘, 30(2), 51-76.
페미니즘은 왜 검열의 기준이 되었는가
2010년대에 들어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의 사회문화적 지위는 변화를 맞는다.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데이트폭력 사건, 미투 운동 등 온라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주축으로 한다. 이와 동시에 ‘페미니즘 = 남성혐오’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정치권과 언론, 심지어 기업 광고마저 페미니즘 논란을 피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그것을 방증한다. GS25의 캠핑 이벤트 포스터2가 대표적인 사례다. 포스터에 등장한 손가락 모양이 커뮤니티에서 남성 혐오의 의미로 사용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온라인상의 거센 공격과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에 GS25는 수차례 사과문을 게시하고 해당 디자인을 전면 수정하였다. 디자이너는 지나친 개인적인 비난에 시달려야 했으나 이에 대한 피해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페미니즘이 사회적 논의의 대상이 아닌 낙인의 언어가 되고, 어떤 표현이든 의심만으로 공격받는 도덕성 테스트로 전락하여 여성들의 일상적 행위와 감정을 검열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연합뉴스.(2021.5.2).GS25 이벤트 홍보물 남성 혐오 논란...결국 삭제·사과.2021.5.2.
이와 같은 사건 이후 섹슈얼리티를 위험으로 다루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에 빚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론가들은 여성이 남성에 의해 억압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섹슈얼리티에서 찾았다.
임국희. (2021). 연애와 사랑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배울 수 있을까?. 일다. https://www.ildaro.com/8992
이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가부장제의 핵심이기 때문에, 여성이 해방되는 길은 친밀한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가 가장 첨예한 정치적 장소가 될수 있다는 통찰은 이전까지 가려져있던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 강간 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친밀한 관계를 다각도로 성찰할만한 교육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지 않은 환경에서 폭력적 상황을 강조하는 교육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을 때 우려스러운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적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적절히 통제하고 협상할 줄 아는 성적주체를 성장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며 둘째, 타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의 즐거움을 다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즐거움은 사적으로 ‘알아서 하는 것’이고, 관계의 문제나 위험만 다루는 것이다.
자기검열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미국 여성 운동의 대모 벨 훅스는 그의 저서 <사랑은 사치일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은 여성들의 삶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럼으로써 여성해방운동이 추구해 온 자아실현을 위한 모든 여성들의 자유를 약화하는 결과를 낳았다.4
이혜미.(2022). 페미니스트이지만, 뜨거운 연애 하고 싶어요. 한국일보. https://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62710410005543
” 페미니즘이 젠더 기반 폭력, 여성의 재생산권, 노동 현장에서의 성평등 등 사회 곳곳의 풍경을 바꾸었지만 궁극의 자유인 사랑을 성공과 권력을 갈망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문화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비연애’, ‘탈연애’, ‘4b’와 같이 남성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단절을 선언하는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오늘날, 연애와 사랑을 다루는 페미니즘은 낡은 것을 넘어 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임국희. (2021). 연애와 사랑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배울 수 있을까?. 일다. https://www.ildaro.com/8992
감정, 선택, 행동까지 감시당하는 여성들의 사례는 다수의 인터뷰와 질적 연구에서 확인된다. 김다미(2017)는 특히 이성애적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배신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에 노출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김다미. (2017). 이성애 연애의 젠더 권력과 20대 고학력 여성의 행위주체성에 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http://www.riss.kr/link?id=T14567920
이는 여성들에게 정치적 완벽성을 강요하는 구조로서, 결국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을 다시 길들이는 역할을 한다. 여성들에게 정치적 완벽성을 강요하는 것이다. 과거 가부장제가 여성다움을 잣대로 여성의 행동을 통제했다면, 이제 는 왜곡된 페미니즘다움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여성을 새로운 틀 안에 가두는 셈이다. 페미니즘이 도리어 새로운 억압의 잣대가 된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23)의 보고서7는 이와 관련하여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규범’처럼 소비되며 여성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자발적 선택조차 의심하게 되는 심리적 압박은 한국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페미니즘 규범화 현상의 결과로 해석 가능하다.
마경희, 박미진, 김정혜, 추지현, 김경희, & 문희영. (2023). 성평등 정책 환경 진단 및
정책 추진 방향 연구 (연구보고서(수시과제)-4).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규율이 아닌 해방을 위한 페미니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페미니즘은 연애와 사랑을 설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접합되어야 한다. 본래 페미니즘이란 가장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정치화하고자 한 것이자, 그 무엇보다 타자와의 윤리를 오랫동안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를 주어지거나 증명된 지식으로 인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사유와 통찰을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식으로 여긴다. 궁극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성적 소통을 지향한다면 관계를 통해 성차를 성찰할 수 있는 페미니즘의 지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마땅하다.
‘여성다움’도, ‘페미니즘다움’도 강요하는 무언가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은주(2017)는 ‘자신이 어떤 구조 안에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아는 것이 해방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임국희. (2021). 연애와 사랑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배울 수 있을까?. 일다. https://
www.ildaro.com/8992
이은주. (2017). 대학생의 연애 경험을 통한 사회적 관계 맺기에 관한 연구. 한국가족
관계학회 학술대회 자료집, 61-70.
사랑하는 여성, 거리두는 여성, 연애하는 여성, 비혼주의 여성. 모두가 자신들의 삶을 해
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구조가 되어야 한다. 이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선택할 권리를 인정하는 사회로서, 정치적 완벽성을 강요하지 않는 환경을 의미한다. 여성의 자기검열은 개인의 민감함이나 감정 과잉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낸 감정 정치의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에게 ‘페미니즘답지 않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방식은 과거 ‘여성스럽지 않다’는 말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규율로 작동하는 지점은 필연적으로 페미니즘 본래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 또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필자는 자신이 속한 사회적 구조와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무엇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어떤 맥락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질문하는 힘이 곧 페미니즘의 힘이며, 이는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잘 인지하고 잘 인식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자기검열을 멈추고 자기를 긍정하는, 해방을 향한 분명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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